[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3부 (3) 일황(日皇) 앞에선 두 사람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10.08 23:00

    [그림자 황후]

    3(3) 일황(日皇) 앞에선 두 사람


    초계는 서양식 저택 앞에 서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해로 가라는 중전마마의 명을 받자, 태웅을 만난다는 기쁨에 먼 길을 마다 않고 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인력거를 타고 찾아온 길이었다.
    마침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식당에서 떠드는 소리와 기름에 음식 볶는 소리가 요란했다.
    ‘놀래켜 줄까?’
    초계는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갔다.
    문틈으로 보이는 건 침대에 누운 태웅의 등이었다.
    "도련님!"
    초계는 눈물을 글썽이며 뛰어 들어갔다.
    "이 도둑년! 썩 나가지 못해? 이것들은 도둑년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뭐하고 있어!"
    알몸이 비치는 잠옷을 걸친 옥주가 소릴 질렀다.
    옥주는 피우던 담배마저 바닥에 던지고 덤빌 듯 발칵 일어섰다.
    놀란 태웅이 바지를 추스르며 일어났다.
    "초계야! 살아있었구나!"
    "저년은 누구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챈 옥주가 태웅을 잡았다.
    "어, 중전마마의 나인이야."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인?’
    초계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옥주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초계를 보는 태웅의 눈빛을 보자 질투심이 타올랐다.
    "종년이 어딜 기어 들어와? 어서 꺼져! 에잇!"
    흥분한 옥주가 두리번거리다 도자기로 된 꽃병을 들어 던졌다.
    "안돼!"
    태웅이 초계를 막아주다 대신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수신사로 일본에 온 박영효는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해 일본의 극진한 대접에 한껏 기분이 좋았다.
    도쿄 아카사카 이궁(離宮)에서 무쓰히토 일황의 은근한 환대를 받았다.
    임오군란 직후 군함과 병사를 이끌고 한성을 쳐들어온 하나부사의 무례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황은 박영효뿐 아니라 김옥균과 민영익도 함께 들게 했다.
    "귀국 대왕께서 안녕하시다니 기쁘기 그지없소. 경이 전권대신으로 파견되어 대왕의 친서를 전하니 화호가 영원히 친밀할 것이라 믿소."
    서른한 살의 무쓰히토 일황은 건장한 체구에 눈매가 강렬했다.
    금실로 수놓은 대례복을 입은 이노우에 외무경이 민영익과 김옥균을 내전으로 인도했다.
    "국사로 고생이 많았을 텐데 지금은 편안하게 되었다니 다행이오."
    일황은 민영익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각별히 초대해주시고 이같이 위문해 주시니 황공하고 또 황공합니다."
    일황은 김옥균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경은 봄 사이에 바다를 건너왔으니 한번 만났다 할 수 있겠소. 귀국의 변란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소. 즉시 나라가 정돈되어 무사히 바다를 건너왔으니 매우 다행이오."
    "이같이 위로하시고 염려해 주시니 황송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김옥균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민영익은 일황이 정사인 박영효보다 김옥균을 내밀하게 대하는 모습이 걸렸다.


    태정대신과 이와쿠라 도모미, 육군경 같은 일본 최고위직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이탈리아·프랑스·독일·네덜란드·벨기에 외교관들의 방문과 초청도 줄을 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박영효와 김옥균 일행을 우호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주선한 결과였다.
    박영효는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 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이는 데 성공하자 자신감과 사기가 올랐다.
    박영효는 이노우에 외무경을 포함해 일본 대신들과 각국 외교관 25명을 엔료칸으로 초대해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엔료칸은 서양식으로 꾸민 최고급 영빈관으로,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이 묵었던 곳이었다.


    영국의 파크스 공사는 박영효 일행에 각별한 호의를 보였다.
    요코하마에서 열린 경마장에 초대한 것이다.
    "이런 곳이 있었군요 대단합니다!"
    박영효는 파크스 공사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련되게 차려입은 외교관과 일본 상류층이 밝고 경쾌한 호화 양장을 하고 참석한 경마장은 고급 사교장이었다.
    중앙아시아산(産)의 잘생긴 말들이 달리며 경주하는 호쾌한 장관이 펼쳐졌다.
    도쿄의 반듯한 길과 우뚝 솟은 서양식 건물, 먼지 하나 없는 정원과 숙소, 선녀 같은 예기(藝妓)들이 술을 따르는 향연, 연꽃봉우리 같은 후지산…….
    하루하루가 꿈속을 걷는 듯했다.


    도쿄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
    후쿠자와가 내온 차를 두고 박영효와 김옥균이 앉아 있었다.
    "먼 곳에서 무사히 오신 각하를 뵙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저야말로 선생을 뵈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동안 박영효와 김옥균은 개화승 이동인이 보내준 후쿠자와의 저작 <문명론의 개략> <서양사정>을 돌려 읽은 터였다.
    "일본에 와 보니 개화의 절실함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각하야말로 김옥균 선생과 함께 조선의 개화를 이끌 분입니다."
    "아! 우리 조선은 언제나 일본처럼 개화할 수 있을까요? 하루빨리 개화를 이루고 싶은 웅심(雄心)이 치밀어 오릅니다!"
    "개화를 앞당기려면 신문을 발행해야 합니다. 게이오의숙을 나오고 내가 운영하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이노우에 가쿠고로와 우시바 다쿠조를 데려가십시오. 신문 발행에 도움이 될 겁니다."
    "마침 우리도 전부터 신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습니다."
    박영효는 김옥균의 도쿄 숙소에서 조선을 경장하자며 밤늦도록 술잔을 부딪쳤다.


    "지금 조선에서 청나라의 양해 없이 맘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상전하와 수신사 박영효 그리고 나 김옥균 세 사람밖에 없소이다."
    노회한 파크스 영국 공사는 김옥균의 이 호기로운 말을 놓치지 않았다.
    파크스는 중국에 잔인한 결과를 안겨준 ‘애로우호 사건’을 처리했고,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을 지원하며 영국에 유리한 통상 조약을 끌어낸 자였다.
    파크스는 수신사가 메이지마루에 탈 때부터 애스턴 영사를 붙여 상황을 탐지하게 했다.
    이홍장이 재촉하는 와중에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맺고, 영국도 재빨리 ‘조영(朝英)통상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영국 상인들은 관세나 자국 상인 보호가 형편없다고 불만이었다.
    파크스는 청국을 배제해야 조선과의 조약 개정이 수월했다.
    청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인정받길 원한 박영효와 김옥균을 자극해 조약 개정의 가능성을 파고들었다.


    이후 파크스는 독일을 움직여 군함 시위까지 벌이며 조선을 압박했다.
    결국 영국과 독일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조약을 개정했고, ‘최혜국 조관’에 따라 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미국과 일본도 영국의 뒤를 이어 실리를 챙겼다.
    이는 부국강병이 시급한 조선 재정에 엄청난 타격이 됐다.
    관세를 통해 차관을 상환하고 거금이 드는 개화 비용으로 충당하려 했기 때문이다.


    1883년 임무를 마친 박영효는 신임 공사로 부임하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함께 메이지마루를 타고 귀국했다.

    (3부 4화는 2021년 10월 15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3부 (2) 의식화의 귀재 김옥균
    그림자 황후 3부 (1) 박영효 메이지마루(明治丸)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2부 (19) 왕비의 귀환
    그림자 황후 2부 (18) 아사달의 성모처럼
    그림자 황후 2부 (17) 대원군 납치
    그림자 황후 2부 (16) 언론을 누르고 임오군란을 이용하다
    그림자 황후 2부 (15) 김옥균 후쿠자와를 찾아가다
    그림자 황후 2부 (14) 시신 없는 관 앞에서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13) 욕망의 나르시시즘
    그림자 황후 2부 (12) 임오군란의 서막
    그림자 황후 2부 (11) 청룡(靑龍)이 나르샤
    그림자 황후 2부 (10) 초승달에 찔리다
    그림자 황후 2부 (9) 꽃 선물을 받고 울다
    그림자 황후 2부 (8) 사랑을 허락하다
    그림자 황후 2부 (7) 강화도 조약과 승려의 요지경
    그림자 황후 2부 (6) 감찰 상궁이 들이닥치다
    그림자 황후 2부 (5) 강 상궁의 마음을 사로잡다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그림자 황후 2부 (2) 사무라이의 메이지유신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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