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 수감 중일 때 이 부회장 사면·가석방론의 명분은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였다. 미중 패권전쟁이 격화하고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한 후 삼성의 과감한 투자를 위한 이 부회장의 역할이 크게 부각됐다.

8월 이 부회장의 가석방을 허가한 법무부는 반도체·백신 역할론 등 경제적 효과를 강조했고, 삼성은 기대했던 대로 이에 화답했다. 삼성의 투자가 이 부회장의 복귀에 맞춰 신속하게 이뤄질 것이란 재계의 전망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삼성전자는 23일(현지시각) 170억달러(20조원)를 투입할 미국 제2파운드리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부지로 텍사스주 테일러시를 최종 확정했다. 이 부회장 가석방 3개월 만의 일이다. 이 부회장은 미국 출장에서 투자를 확장했고, 그간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인 TSMC에 밀려 날개를 펴지 못한 파운드리 부문에 힘이 실렸다.

국내 대기업은 대체로 오너가 수십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나 인수·합병(M&A)과 같은 핵심 사안을 속도감 있게 결정한다. 반면 전문경영인의 결정 과정은 복잡하고 제한적이라고 평가한다. 삼성이 2016년 미국 전자장비기업 하만 인수 후 대규모 M&A가 나오지 않은 것은 오너 부재 영향으로 본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부지에 대한 결정은 이 부회장 복귀 후 금세 나왔지만, 이미 1월부터 큰 이슈였던 만큼 오너 부재 리스크를 11개월간 끌어온 셈이다. 인텔과 TSMC가 각각 3월과 4월에 미국 애리조나에 대규모 투자계획을 밝힌 점을 고려하면 7~8개월 늦었다. 만에 하나 이 부회장이 가석방이 불발됐다고 하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투자 역시 해를 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배경 중 하나는 대기업의 오너 중심 경영이 있고,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병철 창업주와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이 세계 정상급 반도체, 스마트폰, 가전 부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최근 한국 산업계는 반도체 공급 부족과 원자재 가격 급등 등 악재로 몸살을 앓는다. 촌각을 다투며 글로벌 기업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오너가 절대적 권한을 가진 삼성 역시 변화해야 한다. 오너의 결단이 없더라도 전문 경영인이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부회장은 2020년 5월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혁신과 변화를 줄 것이란 기대감이 나왔다. 이 부회장의 선언이 실현되려면 선언식 발표보다 후속 조치가 중요하다. 지금보다 더 빨리 글로벌 시장 변화에 대응하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의사결정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삼성의 ‘통큰’ 결단이 이 부회장에게 달려서는 삼성의 미래를 밝게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