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인력난을 겪는 국내 대기업들이 채용연계형 ‘계약학과’ 설립으로 인재 쟁탈전을 벌인다. 자급자족 전략이다. 대학 입학 때부터 키워 모셔가지 않으면 경쟁사에 인재를 뺏기고, 장기적으로 성장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일이다.

계약학과는 기업의 부족한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통로다. 재학생은 타 학과 대비 높은 장학금 비율과 취업에 대한 걱정을 줄일 수 있다. 서로 윈윈하는 셈이다.

4월 11일 서울 성동구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차세대 반도체 인재양성을 위한 계약식 행사에서 김우승 한양대 총장(왼쪽 첫 번째)과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화면 오른쪽 첫 번째)가 계약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SK하이닉스
4월 11일 서울 성동구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차세대 반도체 인재양성을 위한 계약식 행사에서 김우승 한양대 총장(왼쪽 첫 번째)과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화면 오른쪽 첫 번째)가 계약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의 문을 연 시초는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인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2006년 성균관대학교와 손잡고 반도체시스템공학과를 설립했다. 연세대와도 계약학과인 시스템반도체공학과를 만들어 2021년에 처음 신입생을 받았다. 카이스트·포스텍 등과도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도 2021년 3월 고려대학교와 반도체 공학과 첫 신입생을 받았다. 올해 4월에는 한양대와 ‘반도체공학과’를 신설하기로 했다. 올해 말 정원 40명(수시 24명, 정시 16명) 규모로 첫 신입생을 선발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9월 고려대와 ‘배터리-스마트팩토리 학과’를, 10월 연세대와 ‘2차전지융합공학협동과정’을 각각 신설하며 배터리 인재영입전에 돌입했다. 국내 배터리 업체가 대학과 계약학과를 만들어 인재 채용에 나선 것은 LG에너지솔루션이 처음이다.

장혁 삼성SDI 연구소장 부사장(오른쪽)과 이병호 서울대 공과대학장이 2021년 11월 17일 '서울대-삼성SDI 배터리 인재양성 과정' 협약식을 진행한 모습 / 삼성SDI
장혁 삼성SDI 연구소장 부사장(오른쪽)과 이병호 서울대 공과대학장이 2021년 11월 17일 '서울대-삼성SDI 배터리 인재양성 과정' 협약식을 진행한 모습 / 삼성SDI
SK온도 지난해 울산과학기술원(UNIST)과 ‘e-SKB’ 석사과정 모집 공고를 내고 인재 육성에 돌입했다. 2022년 3월 UNIST 대학원 에너지화학공학과(배터리과학 및 기술)로 첫 입학생을 받았다. 삼성SDI는 서울대·포스텍·KAIST 등과 손잡고 석·박사 장학생을 선발하고, 한양대에 학부생 과정(배터리융합전공)을 열었다.

디스플레이 업계도 뒤질세라 미래의 OLED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계약학과 설립에 뛰어들었다. LG디스플레이는 17일 연세대, 한양대, 성균관대 대학원에 국내 최초 채용 연계형 디스플레이 계약학과를 설립해 석·박사급 디스플레이 전문인력을 양성한다고 밝혔다.

왼쪽부터 송상호 LG디스플레이 CHO, 윤수영 CTO, 명재민 연세대 공과대학장, 박승한 연구부총장 / LG디스플레이
왼쪽부터 송상호 LG디스플레이 CHO, 윤수영 CTO, 명재민 연세대 공과대학장, 박승한 연구부총장 / LG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와 이들 3개 대학교는 2023학년도부터 매년 각 대학원별로 10명의 석·박사급 인재를 육성한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12월에도 연세대와 정원 30명 규모의 국내 첫 채용 연계형 디스플레이융합공학과를 세웠다.

하지만 계약학과를 통해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석·박사과정으로 운영되는 인력은 한 학기당 10~20명, 학과로 뽑는 학생 정원도 20~30명에 불과하다. 각 분야마다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규모다.

반도체 업계는 2022년부터 2031년까지 한국에 총 3만명의 반도체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전지산업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배터리업계 석·박사급 연구·설계 인력은 1013명, 학사급 공정 인력은 1810명이 부족하다. 차기 정부 정책 수립 과정에서 홀대론이 불거진 디스플레이 업계의 인력난은 더욱 심각하다.

재계 관계자는 "계약학과 신설로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분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핵심 연구인력을 육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지만, 미국·중국·대만 등 경쟁국 대비 미미한 규모라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며 "학과 정원을 확대하고 인재 육성을 위한 국책 과제를 늘리는 등 적극적인 정부 지원이 뒷받침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