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인력난을 겪는 국내 대기업들이 채용연계형 ‘계약학과’ 설립으로 인재 쟁탈전을 벌인다. 자급자족 전략이다. 대학 입학 때부터 키워 모셔가지 않으면 경쟁사에 인재를 뺏기고, 장기적으로 성장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일이다.
계약학과는 기업의 부족한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통로다. 재학생은 타 학과 대비 높은 장학금 비율과 취업에 대한 걱정을 줄일 수 있다. 서로 윈윈하는 셈이다.
SK하이닉스도 2021년 3월 고려대학교와 반도체 공학과 첫 신입생을 받았다. 올해 4월에는 한양대와 ‘반도체공학과’를 신설하기로 했다. 올해 말 정원 40명(수시 24명, 정시 16명) 규모로 첫 신입생을 선발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9월 고려대와 ‘배터리-스마트팩토리 학과’를, 10월 연세대와 ‘2차전지융합공학협동과정’을 각각 신설하며 배터리 인재영입전에 돌입했다. 국내 배터리 업체가 대학과 계약학과를 만들어 인재 채용에 나선 것은 LG에너지솔루션이 처음이다.
디스플레이 업계도 뒤질세라 미래의 OLED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계약학과 설립에 뛰어들었다. LG디스플레이는 17일 연세대, 한양대, 성균관대 대학원에 국내 최초 채용 연계형 디스플레이 계약학과를 설립해 석·박사급 디스플레이 전문인력을 양성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계약학과를 통해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석·박사과정으로 운영되는 인력은 한 학기당 10~20명, 학과로 뽑는 학생 정원도 20~30명에 불과하다. 각 분야마다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란 규모다.
반도체 업계는 2022년부터 2031년까지 한국에 총 3만명의 반도체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국전지산업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배터리업계 석·박사급 연구·설계 인력은 1013명, 학사급 공정 인력은 1810명이 부족하다. 차기 정부 정책 수립 과정에서 홀대론이 불거진 디스플레이 업계의 인력난은 더욱 심각하다.
재계 관계자는 "계약학과 신설로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분야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핵심 연구인력을 육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지만, 미국·중국·대만 등 경쟁국 대비 미미한 규모라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며 "학과 정원을 확대하고 인재 육성을 위한 국책 과제를 늘리는 등 적극적인 정부 지원이 뒷받침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