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회를 걸쳐 모바일 IT 산업과 배터리 전기차 같은 미래형 자동차 산업을 완성시킨 주역 이야기를 연재해볼까 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리튬이온 이차전지이다. 이번 회에는 모바일 IT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피게 한 주역이었지만 되려 발목을 잡게 된 소형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현 주소를 조망해보도록 하겠다.
들어가기에 앞서 1990년대 초반 서울 지역의 모 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부제를 만들려고 했을 때 있었던 알력에 얽힌 도시전설 한 편을 소개해볼까 한다.

'때는 바야흐로 학부제로 가기로 결정되고 학과별 공간 재배치와 지원금 배분에 관해 한참 열을 올리던 때였다. 전기, 전자 그리고 제어계측학부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이 마지막으로 모여 자기네 측이 더 큰 공간과 많은 지원금을 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학부내 공청회를 통해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윽고 그 날이 되어 대형 강의동에 모두 모여 전자, 제어계측, 전기순으로 발표를 하기로 했다. 전자공학과는 최근에 부임한 전자공학과 젊은 교수 한 분을 내세워 반도체와 통신 그리고 디지털 영상 기술 이야기로 화두를 열더니 인터넷으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강의동 한쪽에서 '전자! 전자!' 하는 구호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제어계측과도 뒤질세라 촉망받는 신진 학자로 알려진 젊은 교수 한 분이 나와 메카트로닉스, 로봇공학을 이야기하며 이게 결국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 산업이며 혁명을 일으킬 거라며 열띤 발표의 대미를 장식하자 마자 강의동 반대편에서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나오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기과 쪽, 앞선 발표가 길어진 탓에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강의동도 어두워졌지만 OHP로 발표하실 거라 강의동의 형광등은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전기과는 최근 신임 교원 충원이 없었던 탓에 교수님들의 연배가 지긋한 편이었다. 그중 정년퇴임을 앞둔 원로 교수님 한 분께서 발표하시게 되었다. 하지만 곧 문닫고 정리할 랩들이 대부분이라 대학원생도 몇 명 남지 않아 전기공학과 대학원생은 겨우 서너명이 와있을 뿐이었다. 원로 교수님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시더니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셨다가 이윽고 천천히 한 마디 버럭 내던지셨다.
"거기, XX야. 밖에 나가서 도란스 내려 버려라."
(주: 여기서 도란스는 두꺼비집을 뜻한 것이다.) '
이 도시전설은 전기에너지의 중요성을 빗대어 풍자한이야기였는데, 이 이야기를 모바일 IT 산업에 원용하여 틀어 말해본다면 이렇게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이 김 교수, 핸드폰 밧데리 빼고 전화 한 번 걸어봐."
모바일 IT 산업은 이차전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전기에너지를 저장하여 휴대할 수 있게 한 '전기 에너지 저장장치'가 바로 이차전지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세계 최고의 이차전지 기술이 둘씩이나 등장한 1990년대 초반,1993년에 리튬이온 이차전지가 상업적 생산에 성공하며 모바일 IT 산업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상업적 생산에 성공한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편의상 등장 순서대로 나열했을 때 원통형, 각형, 파우치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최초의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소니에너지텍의 18650(직경이 18 ​mm, ​길이가 65mm인 원통형이라서 붙은 이름이다)으로 대표되는 원통형 리튬이온 이차전지이었고 두번째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산요전기의 각형 리튬이온 이차전지이었다. 이 두 가지는 캔 케이스형 리튬이온 이차전지라 통칭할 수 있으며 랩톱 컴퓨터, 셀폰, 그리고 캠코더에 두루 채용되었다(랩톱 컴퓨터, 셀폰, 캠코더는 이니셜의 C를 따서 3C라고도 불렸다). 그로부터 몇년 후 소니에너지텍에 의해 '구부릴 수 있는(Flexible)' 리튬폴리머 전지의 허구와 망상이 또 극복되며 등장한 것이 리튬이온 이차전지용 분리막을 채용한 '단단한(stiff)'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인데, 세번째 등장한 리튬이온 이차전지라 할 수 있겠다.(주: 혹자들은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를 상표처럼 리튬폴리머 이차전지라 호칭하지만,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는 리튬이온 기술을 채용한 리튬이온 이차전지 계열로 구분하는 것이 정확하다. 리튬폴리머전지는 없다).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20년을 갓넘는 짧은 역사를 가진 신생 이차전지로 100년이 넘는 연료전지 보다 훨씬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차전지 역사상 최강의 에너지 밀도를 구현한 덕에 90년대 초창기 연구자들 간에는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신의 선물이다'라고까지 평하기도 했다.
이런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20여 년간 새로운 세대가 나올 때 마다 소위 '기가 커스토머'에 의해 명운이 좌우되었었다.

최초의 리튬이온 이차전지인 원통형 전지는 소니와 함께 시작됐었다. 이때는 아직 모바일 IT 산업이 사실상 개화하는 시기라 소니를 '기가 커스토머'라 하기엔 부족하긴 했지만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인정할 만하다. 랩톱 컴퓨터와 캠코더에 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삼성전자도 CDMA 방식 이동통신 단말기를 개발하며 셀폰에도 초기에 원통형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썼을 정도였었다.(이 당시의 배터리 팩은 18650 원통형 리튬이온 이차전지 2개로 만든 7.2 V의 2S 팩이었다.) 모바일 IT의 중심이 피쳐폰 형태의 셀폰으로 넘어간 2000년대 초반에는 산요전기가 각형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개발하여 노키아와 함께 각형 전지 시장의 전성기를 이끌었었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폰, 아이패드로 신시장을 연 애플이 지지부진하던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파우치형 전지의일종)를 전격적으로 채택하여 자사의 랩톱 컴퓨터에까지 사용하며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 전성기를 열었다. 이처럼 각종의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그때 그때 마다 전성기의 '기가 커스토머'를 만나며 리튬이온 이차전지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점유했었다.

하지만 모바일 IT 제품 사용자 입장이라면 조금은 다른 입장을 견지할 수도 있다. 앞서 표현하길 이차전지 역사상 최강의 성능을 가진 게 리튬이온 이차전지라 하였는데, 외려 피쳐폰을 쓰던 때는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만 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사용자들 사이에 회자된 은어는 '배터리가 녹는다'였다. 이는 아침에 100% 충전하여 나온 스마트폰 배터리가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바닥을 치다 못해 꺼져 버리는 일이 잦다 보니 유행한 은어였었다. 그럼 이게 과연 정상인걸까? 필자도 오전에 많이 쓸 일이 발생하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배터리가 '녹아 버릴 때'가 종종 있었다. 이는 사용자들이 잘 모른다 해서 위로차 동조해주는 게 아니다. 안타깝지만 이건 극히 정상적인 상황이었던 거다.

사용자 입장에서 '이게 무슨 소리야?'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에너지 밀도가 2 ~ 10 배 정도 되는 새로운 이차전지 시스템과 활물질이 개발되었고 몇 년 안에 그 기술이 채용되어 제품으로 출시될 것"이라며 배터리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찬양하는 기사가 쏟아지는 마당이라 더더욱 이상할 만하다. 여기에 더해 시중에는 이미 배터리 기술 발전이 점점 가속화되어 20X0년 경에는 배터리 덕분에 에너지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근거불명의 도시전설까지 흘러다니고 있었고, 관련 도서들은 주요 오프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매대를 독차지하고 있기까지 하니 말이다. 급기야 한때 소형 리튬이온 이차전지 세계 1위였던 곳도 그 저자를 초빙하여 배터리 혁명을 대비하고 있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에너지 혁명의 총아가 될 리튬이온 이차전지가 20년 사이에 에너지 밀도가 안 올라갔다고? 하며 반문을 하는 사용자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과거는 그랬겠지만 사이언스, 네이쳐 같은 권위 있는 학술지와 유수 언론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게다가 격변의 시기가 다가와 에너지 혁명이 일어나기 위한 준비는 다 갖춰져 있다고 말이다.

과연 뭐가 맞는 것일까?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에너지 저장 용량 발전 속도는 어느 정도인걸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괴할 정도의 상황이지만, 직접도를 '저장 용량'으로도 표현하는 메모리 산업의 역사와 살짝 비교해보면 리튬이온 이차전지 기술 진화 속도가 얼마나 뒤쳐져 있었는지 감이 잡힐 듯하다. 한번 차분하게 메모리 직접도와 이차전지의 에너지 저장용량 발전 역사를 이번 기회에 짚어 보면서 그간의 오해를 불식시켜 보도록 하자.

길가다 만나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IT 산업에서 가장 유명한 법칙 하나를 꼽을 수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아마 십중팔구 「무어의 법칙」을 꼽을게다. 무어의 법칙은 18개월마다 메모리 직접도가 두 배 가량 상승한다는 '경험칙'의 일종이다. 무어의 법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네티즌들이 비교해 둔 그림들을 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를 가져와 본다면 2004년에 128 MB '용량'의 microSD​가 출시됐던 반면에 2014년에 128 GB '용량'의 ​microSD이 나왔고 2016년에는 또 256 GB '용량'의 microSD가 나올 정도로 격변 수준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라 하면, 사용자들의 눈에 익은 건 바로 이런 것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늘 새로운 게 나오고 깜짝 놀랄 정도로 발전해 있어야 그게 첨단 기술인게다. 이차전지에도 사용자들은 이런 걸 기대한 것이다.

2004년 TransFlash와 2014년 microSDXC의 메모리 용량(직접도) 비교(출처: Web)
2004년 TransFlash와 2014년 microSDXC의 메모리 용량(직접도) 비교(출처: Web)
그런데 말이다. 전지의 역사를 저장용량(혹은 에너지밀도)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순탄하게 발전하지 않았다. 아니, 발전하지 못했다.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1993년에 소니에너지텍에서 출시한 3.6 V 18650 원통형 전지의 '용량'이 약 1300 mAh 이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3년에는 파나소닉의 3.7 V 18650 원통형 전지의 '용량'은 약 2400 mAh, 20여 년 후에 파나소닉의 18650 원통형 전지의 '용량'도 3600 mAh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압도 고작 0.1 ~ 0.2 V 올라갔을 뿐이다.

본 필자가 책임 운영한 차세대전지 성장동력 사업단의 제1 과제가 2004년 당시에 기획할 때 이랬었다. 늦어도 2010년 경엔 3000 mAh급까지 18650 원통형 리튬이온 이차전지 용량을 높여 보자고 하였다. 당시 주관기관이었던 삼성SDI는 난색을 표명할 정도로 '공격적인' 개발 목표였었다(일화를 밝히자면 전지 크기를 조금 키우는 무빙 타겟 설정도 복안으로 있었을 정도였다). 다행히 계획했던 대로의 개발이 잘 되어 이제는 3600 mAh급의 18650 원통형 리튬이온 이차전지도 볼 수 있게 됐지만, 이 정도로는 타 분야 기술 발전에 비하면 턱도 없는 수준이다.

메모리 '용량'이 대략 1000배 늘어나는 10년 사이에 리튬이온 이차전지 '용량'은 겨우 2배, 20년 만엔 겨우 3배 쯤 늘어났다는 데이터를 솔직히 내놓으면 타 분야 전문가들이 크게 당황하는 걸 종종 봤었다. IT 캐스터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왕왕 하는 말이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어, 이상하다. 제가 어제 읽은 책에는 배터리가 급격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던데, 매년 10~20% 정도씩 발전하고 있어서 좋아질 거라던데요.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니어요?"
"어….. 전압도 거의 그대로네요? 이거 왜 이렇게 안 늘어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기사 나온 걸 봤는데 왜 이래요?"

결국 이런 논의 결과는 "전문가 맞아요? 제가 아는 것도 모르세요?"라며 결론이 맺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리튬이온 이차전지 산업 초창기에 필자 지인 중 하나(H모 국제 합작 전지 벤처의 김모 소장)는 Dxxxxx에서 괜히 리튬이온 이차전지 게시글에 댓글로 맞는 이론을 설명하다가 외려 일부 네티즌이 도시전설을 들이대며 전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나대냐며 혼을 내는 바람에 다시는 Dxxxxx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슬픈 전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과거에만 그런게 아니라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리튬이온 이차전지 쪽은 여전히 많은 오해와 오독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보 '저장용량' 기술을 바라 보는 시각으로 에너지 '저장용량' 기술의 진화를 보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전혀 다른 분야의 '용량'이야기인 만큼 천양지차로 벌어져 있고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인게다. 한때는 몇 분 짜리 고화질 비디오 클립 하나 넣기에도 버거웠던 정보 저장용량 기술은 10여 년 사이에 FHD급 2시간 짜리 영화 여러 편을 담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해진 반면에 에너지 저장용량은 여전히 초라한 상황이며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말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10년 전엔 128 MB 짜리 고화질 비디오 클립을 여러 번 재생해도 소형 리튬이온 이차전지 잔량이 남을 정도였지만 이젠 FHD급 2시간 짜리 영화 한편도 제대로 재생 못할 비루한 신세가 되었다.

메모리 직접도와 함께 이동통신 속도도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며 눈부시게 진화하는 순간에도 이차전지 에너지 저장용량 진화 속도는 거북이보다도 느리게 달팽이가 기어가듯 느릿느릿 진화하여 점점 뒤쳐지고 있는 게 이차전지 기술의 현실인게다.
이처럼 모바일 IT산업의 본격적인 개화기를 알린 것도 '배터리'였지만 발목을 잡는 골칫덩이도 늘 '배터리'였었다. 다른 산업은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며 눈부시게 진화하는 순간에도 달팽이처럼 천천히 기어가듯 진화하고 있는 게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현 주소라 말할 수 있겠다.
이차전지 기술의 급변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혹여 만나게 된다면 조심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