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의 실체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열기는 아직 뜨겁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 등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 혁신에 의해 신개념 비즈니스와 산업이 생겨나면서 산업 생태계가 크게 바뀌는 것은 틀림없다. 일자리뿐 아니라 사회경제 체제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점에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일까?

한국은 1980~90년대까지 경제개발 계획 등 산업화 과정을 정부가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 자본이 축적되고, 기업의 역량이 크게 성장해 2000년대 이후에는 민간 주도 하에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 정부의 역할은 점차 축소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부 관료는 산업 정책, 기술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시행하는 데 사명감과 투지가 넘친다. 새로운 기술적·산업적 이슈가 등장하면 앞다퉈 관련 정책과 사업을 쏟아낸다. 정부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세상의 흐름과 문제 이슈를 정확히 이해해 좀 더 스마트하게 정책과 사업을 개발하고 시행할 필요가 있다. 이에 몇 가지 희망을 적어본다.

첫째, 새로운 기술 개발 지원 사업을 기획·정의·시행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간섭과 역할을 최소화하고 민간·연구자·기업의 창의성과 자율성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빠르게 발전하고 변화하는 기술과 비즈니스에 있다. 어떤 기술이 유망하고 성공할지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개발해야 할 핵심 기술이 무엇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정부는 멀리 앞을 보고 장기적 핵심 기반 기술 개발 환경을 조성하고, 자금을 지원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진국에서 혁신적 기술과 사례가 나오고, 매스컴에서 한동안 보도하고 나면 갑자기 급조한 모방성 연구개발 사업이 봇물처럼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이슈가 되고, 대통령이 한 마디 하면 며칠 만에 막대한 규모의 기술 개발 사업이 공표된다. 연구 기획이라고 하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을 거치지 못한 채 참여자 관심과 이해에 맞춰 뒷북치는 과제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담당 관료가 어설프게 아는 상식으로 간섭하고 칼질하는 경우도 많다. 1~2년 내에 논문, 특허, 상업화 성과를 강요하고 전문성 없는 인사의 평가는 갑질 같은 심사에 그치기 부지기수다. 창의성·혁신성은 존중받지 못하고 시도조차 하기 힘들다. 세계 최고 수준 GDP 대비 연구개발비를 투자를 하면서도 정작 시장을 선도하는 혁신적·창의적 기술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연구와 기술개발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무엇을 연구·개발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세상의 문제는 바로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을 연구개발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몇해 전 김기남 삼성전자 사장에게 직접 물어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그는 문제만 명확히 정의되면 밤샘을 하고, 몸으로 때워서라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니 제발 문제를 잘 식별하고 정의할 줄 아는 사람을 키워달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크게 공감되는 말이다. 정말 중요한 연구이고 돈이 되는 기술이면 사실 정부가 나설 필요가 없다. 하지 말라고 해도 기업들이 달려들고 어떻게든 투자를 끌어낸다. 어설프고 조급하게 연구개발, 기술개발 사업을 재단하고 평가하려고 하지 말고 자금을 지원하는데 주력하는 대신 무엇을 할지는 기업과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일정 기간 이후 전문가들이 창의성·혁신성·잠재력만 평가하면 된다.

100%에 가까운 정부지원 연구사업의 성공률은 진실을 감추고 있다. 위험 높은 벤처기업에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선정하되, 일단 투자하고 난 후에는 너무 조바심 내지 말아야 한다. 성공률은 5% 미만일 수도 있다. 객관성을 빙자해 어설프게 성과를 지표화하려고 하지 말고,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지표도 왜곡될 수 있고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공정한 전문가의 판단이 더욱 객관적이다.

기술개발, 연구개발은 유사하게 반복돼 검증된 방법대로 성실하게 시공하기만 하면 되는 건설 공사와는 다르다. 기술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급속하게 변화하고 발전해 몇 달 후를 알 수 없는 게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술이다. 정부 내 공무원의 인사 및 실적 평가 방식, 예산 제도, 감사 기준 및 체계, 조직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 연구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 지원 방식을 기술개발에도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둘째, 규제를 과감히 개선해야 한다. 오늘날 신기술은 상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개념의 비즈니스 모델과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 성역처럼 여겼던 의료·법률·교육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서비스와 사업 방식이 등장했다. 진입장벽이 해체되고 생태계가 재편된다. 오프라인에서만 제공되던 서비스가 온라인 서비스로 대체되거나, 온라인과 경쟁한다. 온라인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이 오프라인 매장에도 진출하기 위해 인공지능과 인식기술을 총동원해 점원이 없는 무인상점 '아마존고'를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세계 최고 대학의 고품질 강의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누구나 무상으로 수강할 수 있게 하는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 플랫폼은 대학 졸업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유명 출판사는 이제 교과서만 팔지 않고, 성우가 녹음한 고품질 강의 비디오와 연습문제를 함께 제공해 일부 대학이 이를 수업에 사용한다. 명성, 학점 및 성적, 졸업장이라는 무기로 대학이 독점하던 강의와 교육에 민간 기업이 뛰어든 것이다. 온라인 서비스와 오프라인 서비스, 인프라가 결합한 신개념 서비스가 봇물처럼 쏟아진다.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한 초반만 해도 자동차가 길에서 운행하기 위해서는 보행자와 마차의 안전을 위해 기수가 앞장서서 안내를 해야 한다는 규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 규제를 없애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상황에 와 있다.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과 비즈니스를 감당하기에는 우리가 입고 있는 규제의 옷이 너무 무겁고 숨막힌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대륙법 체계를 따르고 있어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전면 교체하기 힘들다면 정부 담당자와 관련 연구소, 대학 등이 급변하는 신기술·신산업 규제와 관련 법률을 철저하게 연구해 선행적으로 대응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 관료를 만나보면 정부는 별 규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제 이슈를 정확히 몰라 해당 법률 규제가 없다고 하거나, 실제로 여러 부서에 산재된 관련 규제를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감사·인증·권고 등의 무형의 규제도 많은 게 현실이다.

셋째, 새로운 시대에 맞게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최근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산업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역량을 요구한다. 교과서의 잘 풀리도록 설계된 문제는 현실 세상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이런 문제에 정답만 찾도록 훈련된 성실한 모범생만으로는 다가오는 세상의 문제를 감당할 수 없다. 국내외 전문가와 기업은 이구동성으로 창의성, 문제 식별, 정의, 해결, 비판적 사고, 커뮤니케이션, 팀워크, 리더십, 창업가적 역량을 요구한다.

최근 SK 사회공헌위원장을 만나보니, 더 나아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성과 리더십을 주문했다. 이러한 역량은 해당 과목을 만들어 강의한다고 키워지는 게 아니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교육이 필요하다. 일방전달 방식의 강의를 없애 수업방식, 학습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 학기, 학점, 시간표, 교과과정 등 대량교육을 위해 발전해온 교육 체계를 전면 개편해 개인 맞춤형 교육, 평생교육, 재교육을 위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수능시험이 조금만 쉬워지면 변별력이 떨어진다고 대학들부터 난리가 난다. 하지만 미래 역량은 수능 시험과 크게 상관성이 높을 것 같지 않다.

몇 주 전에 공학해석용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으로 잘 나가는 마이다스아이티 임원을 만났을 때 들은 말이 기억난다. 출신학교나 성적과 같은 스펙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밑에 숨겨진 인성, 잠재력, 역량만을 자체 개발한 500여개 설문으로 테스트하고 분석해 인재를 선발하니 훨씬 좋은 성과를 냈다고 한다. 충격이었다. 솔직히 대학이 기업보다 못하다고 생각된다. 자신에게 수월한 학생만을 선발하려는 대학과 교수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업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이 기쁘다. 정부는 우리 교육을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혁신을 유도해야 한다.

자동화·지능화로 일자리가 급속히 줄어든다. 중산층 일자리, 전문직도 위험하지만 일차적으로 중하위 소득계층의 일자리가 더 빨리 감소한다. 특히 아직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일자리가 더 많이 감소한다. 사회적 격차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일자리는 과학기술 역량, 디지털 역량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2017년 상위 20개 직업은 모두 과학기술 역량을 요구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비기술직의 여성비율은 52%에 이르지만 기술직은 20%에 그쳤다. 액센츄어 컨설팅에 의하면 디지털 역량을 점수화했을 때 미국 여성은 55점인데 비해 우리나라 여성은 40점이라고 한다. 여성인력 개발, 재교육, 과학기술 및 디지털역량의 교육이 시급하다. 적절한 동기부여와 유인책이 필요하다. 미래에 요구되는 감성역량, 대인역량, 창의 및 창조 역량 등 여성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체계적 교육, 훈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사회경제체제가 변혁할 것에 선행적으로 대비하는 정책 개발이 필요하다. 부와 가치의 창출에서 노동이 차지하던 역할이 점차 감소하고 기술과 자본의 역할이 커질 것이다. 일자리의 개념, 근무 방식, 급여체계, 조세체계, 노동정책, 인구정책, 복지 및 사회 보장체계 등이 크게 변화할 것이다. 기업은 경쟁과 생존을 위해 자동화·지능화를 포기할 수 없다. 변혁의 거센 물결을 일시적 규제로 막을 수는 없다. 사회 전체적으로 노동력의 수요가 크게 줄 것에 대비해 장기적으로 주당 근무일수와 근무시간을 줄이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인류가 언제부터 일요일과 일당 근무시간 제도를 갖게 됐고 언제, 왜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로 진화해왔는지 깊이 있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단순한 유행어만은 아니다. 급격한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고 있다. 깊은 이해와 스마트한 준비가 필요하다. 스마트한 우리 정부가 잘 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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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억 교수는 KAIST 산업 및 시스템 공학과 교수, 교육원장이며 대한산업공학회 회장입니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교육부 대학구조개혁위원회 위원, 신성장동력기획단 위원, KAIST 정보시스템연구소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자동화, 정보기술 응용, 산업지능 분야 전문가이며, 일방전달방식강의에서 탈피하는 수업방식 혁신을 통한 교육혁신, 교육의 기회 균등 실현을 위한 온라인대중공개강좌(MOOC) 확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KAIST,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옛 미래창조과학부) 및 한국연구재단의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