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현대판 ‘마녀'로 만들어지고 있다. 21세기 기성세대는 게임을 젊은이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새로운 악으로 낙인을 찍으려 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의 ‘게임중독=질병' 최종 의결에 대해 게임업계와 관련 단체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더불어 게임 업계의 위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게임중독은 질병" 전체회의서 최종 의결

세계보건기구(이하 WHO)는 25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72차 WHO총회 B위원회에서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코드로 등재하는 안건이 통과했습니다. 게임이용장애(코드명 ‘6C51’) 내용을 담은 11차 국제질병분류 개정안(ICD-11)은 2022년부터 194개국 WHO 회원국에 적용됩니다. 하지만 WHO의 질병 기준은 권고 사항일 뿐입니다. 개정안에 대한 사후 처리는 각국 보건당국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이번 결정으로 각국 보건당국은 게임이용장애와 관련해 보건 통계 작성과 질병 예방 및 치료를 위한 예산 배정이 가능하게 됩니다.

제72차 총회. / WHO 갈무리
제72차 총회. / WHO 갈무리
◇ 게임 순기능 무시되고 역기능만 부각

게임이 담배, 알콜, 도박, 마약 등 다른 중독 물질과 다르게 순기능이 많음에도 역기능만 너무 부각됐습니다. 게임을 즐기는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어린이보다 학업 성적과 사회성이 더 우수하고, 시각과 지각 능력 상승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게임의 순기능을 더 확대 발전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을 노년층 우울증 감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로 알 수 있습니다. 3차원(3D),가상현실(VR), 증강현실(AR)과 같은 기술을 게임과 접목해 그간 정신적, 심리적 질병을 치유할 수도 있습니다.

◇ 해외 전문가, 게임중독 질병 분류는 과학적 근거 없어

해외 의학·심리학 전문가들은 게임 질병 분류가 과학적 증거나 근거자료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했습니다. 이들은 게임 의존 증상이 금단증상과 같은 전통적인 중독 질병과 궤를 달리해 질병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입니다. 인터넷 등 다른 요인과 혼재돼 과학적이지 않고, 게임이 정신 관련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 정부 책임론

게임의 순기능도 무시되고, 질병이라고 규정지을 기준도 모호하지만, WHO는 게임에 중독적으로 몰입하는 행동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이렇게 될 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을까요? 게임이용장애가 ICD 개정까지 간 데엔 우리나라 정부와 정치권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게임산업을 보호해야 할 정부와 정치권이 오히려 앞장서 죽였다’는 얘깁니다.
문재인정부의 게임산업 육성 의지도 새삼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청와대가 그간 게임 질병 등재를 놓고 보건복지부와 문체부가 팽팽히 싸우는 데도 어떠한 중재나 조정 노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WHO 총회가 임박할 때까지 방관함으로써 사실상 WHO총회 정부대표인 보건복지부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대선후보 시절 "한국 게임 산업은 물론 e스포츠 분야 최강국이었는데, 게임을 마약처럼 보는 부정적 인식과 그로 인한 규제 때문에 추진력을 잃고 중국에 추월 당했다"며 "인식과 규제만 바꿀 수 있다면 게임은 얼마든지 한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상반된 상황입니다.

일각에서는 WHO의 이번 게임중독 질병 분류가 중국과 한국 정부 탓이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프레이밍햄 주립 대학교의 ‘앤서니 빈' 임상심리학과 교수는 "WHO 가맹국인 중국·한국 정부가 수 년간 게임 중독을 골칫거리로 여겨왔고 법적으로 이를 제한할 수단을 찾아왔다"며 "WHO의 의사결정 과정에 중국·한국 정부의 움직임이 영향을 줬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중국은 자연과학 펀드를 총괄 조직 NSFC가 50편에 달하는 게임중독 관련 논문에 연구비를 지원했고, 한국 역시 보건복지부와 미래창조과학부 등 정부 기관이 게임 중독과 관련한 연구를 지원해 왔습니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은 2013년 한국중독정신의학회가 ‘게임중독법 입법이 숙원사업’이라고 표현한 것을 예로 들며 "게임 중독 질병 코드 분류는 일부 세력이 경제적 이윤을 위해 게임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공대위 출범식 참석자들이 항의 표시시 검은 옷을 입고 '게임 장례식'을 선포하며 선언문을 읽고 있다./ 김형원 기자
공대위 출범식 참석자들이 항의 표시시 검은 옷을 입고 '게임 장례식'을 선포하며 선언문을 읽고 있다./ 김형원 기자
◇ 게임업계와 관련 단체 ‘반발’

WHO의 결정과 복지부의 움직임에 게임업계와 관련 단체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지난 5월 29일 한국게임학회, 게임개발자협회 등 90개 협단체로 구성된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이하 공대위)가 결성하고, 게임 질병 분류가 게임 문화와 산업에 사망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공대위는 "게임이 문화가 아니라는 자들에 대항해 당당히 맞서 지능적으로 변신해 게임 질병 분류 찬성론자들의 논리에 맞서고자 한다"며 "게임 질병 분류 찬성론자는 과거 ‘게임은 마약’이라는 논리에서 ‘소수지만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고 우리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 우회하지만 그들의 결론이 변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 회장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게임 과물입 질병 분류가 보건복지부와 게임산업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는데요. 위 회장은 국방부는 게임 과몰입의 정신 질환 분류로 젊은이들의 병역 특례 및 기피 현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중소벤처기업부는 산업 위축으로 인한 고용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게임의 문화적 사회적 가치에 대한 몰이해로 디지털 콘텐츠 산업 전체를 위협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협회는 "게임이용장애 질병 분류 체계가 국내에 도입되어 게임이 의료적 장애 진단의 대상으로 인식될 경우 관련 산업 투자 및 고용 축소, 기술 연구 및 지원 감소, 매출 하락, 산업 규제 강화 등으로 디지털 경제 전반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 확산될 것이다"라며 "이는 게임은 물론 국내 IT기업의 성장을 둔화시켜 글로벌 경쟁력을 심각하게 위축시킬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WHO의 게임이용장애 현상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국가가 게임을 질병으로 분류하는 것은 헌법상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임상혁 한국게임법과정책학회 회장은 "WHO의 게임이용장애 의결은 그 해석과 집행에 따라 게임과 관련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만일 게임의 과몰입 현상을 '중독'이라는 질병의 틀에 넣고 국가의 보호대상이나 후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개인의 자유 이념에 배치되는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셜네트워크를 중심으로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 분류 결정에 대한 조롱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게임중독으로 조퇴하겠습니다. 조퇴 사유 생겼네", "이제 게임중독으로 학교 안 가도 되나?", "야구·축구 중독세부터 내라고 해라", "게임중독이 질병이면 연애도 질병이다" 등 조롱글이 SNS로 퍼져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