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우리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다. 예술 분야도 피해 갈 수 없다. AI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시대다. 저명한 인간 작가보다 AI 화가의 작품이 화제를 모으며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AI ART’ 등장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또 누군가는 인간의 창작 세계를 넓히는 데 AI가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AI 창작으로 예술 분야의 가치와 영향력이 커진다는 주장도 있다. 예술계에 부는 새로운 AI 바람을 [AI ART 예술의 의미를 묻다] 시리즈로 인사들의 기고를 준비했다. [편집자주]


⑪유진 그래픽 아티스트 "당신이 생각하는 익명(Anonymous)은 어떤 모습입니까"

익명(Anonymous)이라는 단어를 AI에 전달했고 사람을 연상시키는 밑그림을 돌려받았다. 수면 위의 이름 모를 꽃, 어두운 실루엣의 익명인 누군가에게서 찬란하게 빛나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 찬란함이 꽃이 되어 물 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기를 바라며 그림을 완성했다. 현실을 초월하는 에너지, 가능성. 가능성은 희망과 미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메진AI라는 이름의 크리에이티브(Creative) AI에게서 받은 영감을 또 다른 시각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 작품은 AI에게서 전달받은 밑그림에서 시작됐다. ‘익명’이라는 키워드를 AI에 제시하고 약 1만 번의 연산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 위에 그래픽 작업을 더해서 작품을 완성했다. AI 화가가 주어진 키워드를 학습해 추상적인 밑그림을 그려낸 후 인간 화가가 상상을 더한 작품이다.

필자는 AI와 예술 작품을 그리는 그래픽 아티스트이다. 어릴 때부터 수채화, 유화, 펜화 등을 해왔고 지금도 꾸준히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린다. 현재는 컴퓨터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가장 익숙하고 흥미롭다. 머신러닝 기술로 색다른 작품을 생산하며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같은 도상에 스타일이 이미지와 변숫값을 달리해서 유화, 수채화, 펜화 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연필을 들지 않고도 사진을 활용해 밑그림을 빠르게 그려낼 수 있다.

AI가 ‘익명(Anonymous)'이라는 키워드를 받고 완성한 밑그림(왼쪽)과 유진 그래픽 아티스트가 AI 그림을 보충해 완성한 ‘수면 위의 이름 모를 꽃' 작품. / 유진 그래픽 아티스트 제공
AI가 ‘익명(Anonymous)'이라는 키워드를 받고 완성한 밑그림(왼쪽)과 유진 그래픽 아티스트가 AI 그림을 보충해 완성한 ‘수면 위의 이름 모를 꽃' 작품. / 유진 그래픽 아티스트 제공
필자는 그림 그리는 AI를 마주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왜 기계가 그림을 그려야 할까? 왜 우리는 기계에 창의를 불어넣으려고 하는가?"

인간이 예술 활동을 하는 데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이 필요하다.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도 뒤따른다. 예술가로서 화가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예술과 예술가의 가치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림을 좋아하고 이를 그리는 사람으로 늘 이런 질문을 한다. 그래서 AI 화가와 작업하며 사람 화가를 이해하기 위한 호기심을 풀어가고 있다.

19세기 사진기의 등장으로 수많은 회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회화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범위가 크게 확장됐다. 사진기로 보게 된 동적인 피사체를 캔버스로 옮겨 역동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예술가는 눈에 보이는 그림만을 그리던 화가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과 사상을 표현하는 작가로 변모하게 됐다.

AI 창의로 예술계는 큰 전환점을 맞고 있다. 기계가 그림을 생산하고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예술은 누군가 이겨야만 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정복이란 있을 수 없다. AI는 인간의 본질을 대체할 수도 없다. AI 작품이 감탄을 넘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인간의 예술혼은 죽지 않는다.

근래 예술적 창의는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통의 발달로 대륙 간 이동이 잦아지면서 일반인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진 지금, 하나의 사조로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술의 범위가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추세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정보의 접근성 측면에서 그 격차가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인류의 긴 역사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픽 아티스트인 필자에게 AI의 존재 의미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기술이 과거의 경험과 연결돼 전에 하지 못했던 창작물을 만드는 시도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AI가 개인의 창의성 너머에 발견하지 못했던 가치를 발견하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진 그래픽 아티스트는 AI 그래픽 연구개발 스타트업인 펄스나인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근무한다. 펄스나인에서 그림 그리는 AI인 이메진AI 개발에 참여했다. 한양대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