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 필사감으로는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데뷔작 《나목(裸木)》을 골랐습니다. 박완서는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 15편의 장편 소설과 100편이 넘는 단편 소설, 그 외 많은 산문과 동화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한 ‘영원한 현역 작가’였습니다. 작가 자신이 ‘첫 작품이자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꼽은 《나목》을 필사하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세요. 2012년 세계사에서 나온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을 참조했습니다. /편집자 주

'7,80년대 민중민족문학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된 문학계에서 간과됐던 중산층의 삶을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 박완서(왼쪽)의 등단은, 한국전쟁이 터진 이듬해 겨울, 서울이 막 수복된 직후 실제로 미군 PX 초상화 가게에서 일했던 작가가 그 때 만난 바 있는 화가 박수근의 전기를 쓰고자 하는 데서 시작됐다. “전기(=논픽션)을 쓰자니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고, 거짓말을 보태니까 훨씬 즐겁고 너무너무 빨리 글이 써지더라”고. 원고지 1200장 분량의 《나목》은 습작 없이, 단 한 번만에 공모에서 당선됐다. 오른쪽은 〈여성동아〉 1970년 11월호 별책부록 표지.
"7,80년대 민중민족문학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된 문학계에서 간과됐던 중산층의 삶을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 박완서(왼쪽)의 등단은, 한국전쟁이 터진 이듬해 겨울, 서울이 막 수복된 직후 실제로 미군 PX 초상화 가게에서 일했던 작가가 그 때 만난 바 있는 화가 박수근의 전기를 쓰고자 하는 데서 시작됐다. “전기(=논픽션)을 쓰자니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고, 거짓말을 보태니까 훨씬 즐겁고 너무너무 빨리 글이 써지더라”고. 원고지 1200장 분량의 《나목》은 습작 없이, 단 한 번만에 공모에서 당선됐다. 오른쪽은 〈여성동아〉 1970년 11월호 별책부록 표지.
나목(裸木) ① (글자수841, 공백 제외 630)

새로 온 옥희도 씨는 환쟁이들의 이런 반발을 아는지 모르는지 듬직한 등을 이쪽으로 돌린 채 아무것도 진열돼 있지 않은 쇼윈도를 가려놓은 부연 휘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그릴 것을 마련하기 위해 서랍 속의 사진들을 모조리 꺼냈다. 기한에 관계없이 그리기 쉬운 것, 까다롭지 않은 주문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숱한 얼굴, 얼굴들. 이국의 아가씨들은 한 번도 전쟁이 머리 위를 왔다갔다 하는 일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늘진 데가 조금도 없어서 인간적이 아닌, 동물이라기보다는 화사한 식물에 가까운, 만개한 꽃 같은 얼굴들이었다.

그 중에서 특징을 잡기 쉽고 모발이나 눈빛이 복잡하지 않은 것을 몇 장 골라 가지고 옥희도 씨한테로 갔다.

(중략)

나는 빈 깡통에 꽂힌 별로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 몽톡한 붓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필요한 몇 가지 일을 일렀다.

"붓이나 물감은 제공하기로 돼 있어요. 헝겊도 제공하기는 하지만 망쳐 놓으면 배상하셔야 되구요. 스카프 하나 망쳐 놓으면 그림 두 장 값이 날아가게 되니까 까딱 잘못하면 하루종일 헛수고하게 되죠. 그래도 망쳐놓은 만큼의 물감값은 따지지 않으니 후하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참, 손님이 마땅치 않아 하면 몇 번이라도 고치든지 뭣하면 아주 새로 그려 줘야 되구요. 아무튼 제일 중요한 건 닮게 그리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는 대답 대신 어린애처럼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그와 나의 눈길이 마주쳤다. 내가 먼저 섬뜩해져서 눈을 피했다. 아주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이 그의 눈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는 연방 고개를 기우뚱거려가며 밑그림을 그리면서 가끔 주문처럼 나직이, "아주 닮게, 아주 닮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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