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제대로 한 방을 맞았다. AMD가 발표한 차세대 라데온 RX 6000시리즈 때문이다. ‘역대급 성능’으로 꼽히는 엔비디아의 지포스 RTX 3090과 동급으로 보이는 AMD의 ‘라데온 RX 6900 XT’가 무려 60만원쯤 더 저렴한 가격에 선보였다. ‘가성비’로 압도한 셈이다;

업계는 엔비디아가 어떤 식으로 반격에 나설 것인지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일부 모델의 가격 조정과 더불어, 예정된 후속 라인업의 조기 출시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29일 새벽 AMD가 차세대 라데온 RX 6000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 날 최대 이슈는 RX 6900 XT 모델 가격이 ‘999달러’라는 것이었다. / AMD
29일 새벽 AMD가 차세대 라데온 RX 6000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 날 최대 이슈는 RX 6900 XT 모델 가격이 ‘999달러’라는 것이었다. / AMD
동급 성능에 500달러나 더 싼 ‘라데온 RX 6900 XT’

29일 새벽 1시 온라인으로 진행한 AMD의 차세대 라데온 RX 6000시리즈 GPU의 발표는 앞선 ‘라이젠 5000시리즈’ CPU 발표에 비해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미 발표 전에 전체 라인업과 핵심 스펙, 대략적인 성능 등의 정보가 커뮤니티 등을 통해 유출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식 발표에서 밝힌 제품 사양과 구성, 성능 그래프의 내용은 유출된 정보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유출 자료에 없던 라데온 RX 6000시리즈의 권장가격이 공개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전날까지 지포스 30시리즈가 ‘역대급 가격 대비 성능’으로 호평받은 게 무색할 정도로 AMD는 더욱 파격적인 가격표를 꺼내 들었다.

지포스 30시리즈 중 최고 인기 모델로 꼽히는 ‘지포스 RTX 3080’에 대응하는 ‘라데온 RX 6800 XT’가 50달러 더 저렴한 649달러(73만6000원)의 가격표를 달았다. AMD 발표 자료 기준으로 동급의 성능에 6만원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나온 것.

하위 모델인 ‘라데온 RX 6800’은 경쟁 제품인 지포스 RTX 3070(449달러)보다 비싼 579달러(65만6000원)에 선보였다. 그 뒤를 이어 발표된 라데온 RX 6900 XT의 가격은 시선을 압도했다. 1499달러의 지포스 RTX 3090과 비슷한 성능을 갖췄다고 강조한 ‘라데온 RX 6900 XT’가 무려 500달러 더 저렴한 999달러(113만2000원, 이상 VAT 별도)의 가격에 공개됐기 때문이다.

라데온 RX 6900 XT의 가격이 공개되자 발표가 진행되는 영상에는 실시간 댓글로 ‘RIP 엔비디아’, ‘RIP 3090’ 같은 엔비디아를 조롱하는 멘트가 쏟아졌다. 엔비디아의 GPU 발표 때마다 댓글로 무수히 달리던 ‘RIP AMD’, ‘RIP 라데온’ 같은 반응을 그대로 되돌려준 셈이다.

AMD가 라데온 RX 6000시리즈를 파격적인 가격에 선보인 것은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다. 현재 엔비디아의 독점이라 할 정도로 게이밍 그래픽카드 시장 점유율이 크게 벌어진 상태에서, 작정하고 준비한 라데온 RX 6000시리즈까지 외면받으면 더는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후속 대응이 어떻게 됐든 소비자들에게 강렬한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가 라데온 RX 6900 XT의 ‘999달러’라는 가격표인 셈이다.

반격에 나설 엔비디아, 가격 조정·후속 모델 조기 투입 나서나

AMD의 강렬한 ‘한 방’을 맞은 엔비디아가 대응에 나설 것은 확실하다. 성능적인 면에서는 라데온 RX 6000시리즈의 실체가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만큼 당장 급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작정하고 지포스 RTX 3090을 저격한 RX 6900 XT의 ‘999달러’라는 가격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팩트다.

엔비디아가 자신있게 내놓았던 지포스 RTX 3090(사진)의 1499달러 가격이 오히려 독이 됐다. / 엔비디아
엔비디아가 자신있게 내놓았던 지포스 RTX 3090(사진)의 1499달러 가격이 오히려 독이 됐다. / 엔비디아
당장 엔비디아가 꺼낼 수 있는 카드는 ‘가격 인하’다. 30일부터 글로벌 시장에 판매될 예정인 RTX 3070과 여전히 없어서 못 팔 정도의 인기인 RTX 3080은 현재의 가격으로 버틸 수 있지만, RTX 3090은 가격 조정을 피할 수 없다.

이미 RTX 3090은 10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대다수 온라인 쇼핑몰에서 여유 있게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판매량이 급감한 상태다. 가뜩이나 비싼 가격으로 수요층이 한정된 상황에서 현재의 가격을 유지했다간 그나마 남아있던 수요마저 사라질 위기다.

실제로 AMD의 발표 직전 RTX 3090을 구매한 이들은 ‘999달러’의 최대 피해자로 꼽힌다. 이미 적지 않은 RTX 3090 구매자들이 구매를 취소하거나 반품을 고려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구매한 지 7일이 넘어 반품이 불가능한 해당 제품 사용자들은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중고 매물로 급처분에 나설 기세다. 엔비디아가 가격 인하 등의 후속 조치를 취해도 이미 제품을 구매한 이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소문만 무성하던 ‘3070 Ti’, ‘3080 Ti’ 등 후속 모델들의 정식 출시도 앞당겨질 전망이다. 사양과 성능이 좀 더 개선된 후속 제품을 선보이고, 기존 모델의 가격을 인하하는 것은 엔비디아의 전통적인 마케팅 전략 중 하나다. 다만, AMD의 공세를 견제하기 위해 해당 제품들의 출시를 서두를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지포스 30시리즈의 흥행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특히 지금도 공급 부족으로 원하는 제품을 구하지 못한 지포스 RTX 3080의 대기 수요자들이 관망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물량 부족으로 원하는 제품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데다, 좀 더 기다리며 차세대 라데온의 실제 성능을 확인하고 나서 구매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AMD의 라데온 RX 6000 시리즈는 일단 파격적인 가격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 AMD
AMD의 라데온 RX 6000 시리즈는 일단 파격적인 가격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 AMD
물론, 엔비디아가 실질적으로 입는 타격은 당장의 판매량 감소 외에는 그리 크지 않을 전망이다. 차세대 라데온 그래픽카드가 출시되고, 실제 성능이 예상보다 잘 나오더라도 AMD가 현재의 게이밍 그래픽카드 시장 판도를 완전히 뒤집기란 쉽지 않다. 지포스 RTX 30시리즈만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하는 데다, 일부 소비자들의 AMD 하드웨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엔비디아는 지포스 30시리즈를 발표하며 그렇게 강조하던 ‘가성비’에서 제대로 한 방을 맞으며 체면을 구겼다. ‘가격 책정에 너무 안일했다’는 지포스 RTX 3090 선 구매자들의 불만과 항의도 피할 수 없다. 공급 부족 문제도 현재 진행형인데, 그 와중에 후속 제품 출시 일정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반강제로 대책을 강구해야 할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이번 AMD의 라데온 RX 6000시리즈가 당장 어쩔 수 없는 눈엣가시인 셈이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