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대비 성능이 대폭 향상된 ‘라이젠 5000’ 시리즈 CPU와 ‘라데온 RX 6000’ 시리즈 그래픽카드를 선보이며 승승장구를 기대했던 AMD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 연말 성수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공급 부족으로 흥행 가도에 빨간 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AMD가 신작들이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데 반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라이젠 5000 시리즈 CPU는 경쟁사를 넘어선 게임 성능으로, 라데온 RX 6000 시리즈는 경쟁사에 뒤쳐진다는 평가를 받던 그래픽 성능을 단숨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올렸다면서 각각 PC 업계에 상당한 파란을 일으켰다. 라이젠 5000 시리즈 CPU는 11월 6일부터, 라데온 RX 6000 시리즈 그래픽카드는 11월 19일부터 판매가 시작되자 차세대 신제품의 성능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PC 마니아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차세대 ‘라이젠 5000’ 시리즈 CPU를 들어보이고 있는 리사 수 AMD CEO / AMD
차세대 ‘라이젠 5000’ 시리즈 CPU를 들어보이고 있는 리사 수 AMD CEO / AMD
하지만 출시 직후 공급된 물량이 부족해 순식간에 판매가 종료됐다. 특히 라이젠 5000시리즈 중 가격 대비 성능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라이젠 5 5600X의 경우, 출시 직후 2주간은 웃돈을 줘도 제품을 못 살 정도였다. 이후 5600X를 구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상위 모델인 5800X, 5900X로 몰리면서 해당 모델들도 금세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라이젠 5000시리즈로 업그레이드를 준비하던 소비자들의 상당수가 CPU를 구하지 못해 PC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 커뮤니티 등에서 회자됐다. 일부 소비자들은 라이젠 5000 시리즈 구매에 보태기 위해 기존에 쓰던 구형 CPU를 먼저 처분해 당장 쓸 CPU가 없다며 호소했다.

11월 중순 이후 조금씩 물량이 공급되기 시작했지만, 전작 대비 기본 출고 가격이 오른 데다 품귀현상으로 인한 프리미엄까지 붙으면서 가격마저 껑충 뛰었다. 가격 비교 사이트를 검색하면 제품을 판매하는 곳은 있지만 초기 출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곳은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라이젠 5000시리즈를 위한 AMD 500시리즈 칩셋 메인보드도 기존 물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기존에 판매 중이던 500시리즈 칩셋 보드의 업데이트를 위해 제조사들이 물량을 회수하면서 일시적인 물량 부족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문에 당장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당수의 예비 구매자들은 충분한 물량 확보와 가격 안정화를 기다리며 대기 수요로 돌아선 상태다. 앞서 출시된 엔비디아의 지포스 30시리즈 그래픽카드가 물량 부족 사태이후 펼친 ‘정가 판매’ 정책 덕분에 가격이 안정화되자 이를 경험한 소비자들이 정가 이상으로 부풀려진 가격에 제품 구매를 꺼리기 시작한 것도 한몫한다.

AMD 라데온 RX 6000 시리즈 그래픽카드 / AMD
AMD 라데온 RX 6000 시리즈 그래픽카드 / AMD
라데온 RX 6000시리즈도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 초기물량으로 공급된 라데온 RX 6800 XT의 레퍼런스 제품은 실제 구매자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적은 물량이 공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커뮤니티 등에 테스트용으로 제공된 샘플을 제외하면, 일반 구매자의 사용 경험이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다.

AMD CPU와 그래픽카드의 공급 부족 및 품귀 현상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도 마찬가지다. 일부 소비자들이 아마존이나 뉴에그 등 해외 쇼핑몰을 통한 직구를 시도했지만, 역시나 물건이 없어 대부분 구매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AMD가 충분한 물량 확보도 안 하고 페이퍼런칭(실제 물건이 없이 출시하는 것)을 한 셈"이라며 격앙된 목소리도 나온다.

처음부터 충분한 물량 확보가 어려웠던 AMD의 상황

AMD가 차세대 CPU와 그래픽카드 공급 부족으로 진통을 겪는 것은 애초부터 충분한 물량 확보가 어려운 상황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AMD는 PC용 라이젠 CPU와 라데온 GPU뿐 아니라 차세대 게임 콘솔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시리즈 엑스 및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5에 탑재되는 APU(AMD 그래픽 통합 프로세서의 별칭)도 동시에 공급하고 있다.

즉, 자사 칩을 위탁 생산하는 TSMC의 제조 물량이 한정된 상황에서 여러 신제품을 동시에 선보이고 공급하다 보니 충분한 물량 확보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해석이다. 무엇보다 애플, 엔비디아, 퀄컴 등 굵직한 반도체 기업을 고객사로 둔 TSMC는 이미 발주 물량이 포화해 AMD만 공급량을 늘려줄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AMD 입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와 소니는 자사의 최대 거래처들이다. 자사에 할당된 TSMC의 한정된 생산 물량 중에서 엑스박스와 플레이스테이션 신제품에 우선으로 APU를 공급하다 보니, 정작 PC용 CPU와 GPU 생산량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MD는 자사 CPU 구매시 최신 게임 ‘파크라이6’(사진)를 증정하는 프로모션을 라이젠 5000 시리즈 뿐 아니라 3000 시리즈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 AMD
AMD는 자사 CPU 구매시 최신 게임 ‘파크라이6’(사진)를 증정하는 프로모션을 라이젠 5000 시리즈 뿐 아니라 3000 시리즈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 AMD
그 때문에 업계에서는 AMD의 물량 공급 정상화가 올해 안에는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AMD 입장에서 당장 공급 물량을 늘릴 수 있는 뾰족한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분간은 재고 처리도 겸해서 기존 라이젠 3000 시리즈와 라데온 RX 5000 시리즈도 함께 마케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AMD는 11월 25일부터 시작한 최신 게임 ‘파크라이6’ 증정 프로모션에 새로 나온 라이젠 5000 시리즈뿐 아니라 기존 라이젠 3000 시리즈의 상위 모델도 증정 대상에 포함했다. 신모델 판매 촉진을 위해 최신 제품에만 게임을 증정하던 이전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그래픽카드 관련해서는 국내 한정이긴 하지만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어둠땅’ 출시를 기념한 한정판 그래픽카드를 선보였는데, 대상 제품은 역시 한 세대 전 제품인 라데온 RX 5600XT다. AMD 측은 이후 프로모션 대상 그래픽카드를 확대한다는 방침이지만, 당장 최신 제품인 라데온 RX 6000 시리즈에도 한정 프로모션이 적용될지는 미지수다.

업계 한 관계자는 "AMD는 경쟁사와 점유율 격차를 상당히 좁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물량 확보에 실패해 중요한 초기 흥행 전선에 먹구름이 낀 것을 보면 속이 탈 수 밖에 없다"며 "지금의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고 말했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