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을 만나기 전까지 책을 꽤 진지하게 읽었다. 내가 관심 있거나, 직업상 꼭 필요한 책 위주로 읽었다. 교보문고를 둘러보면서 마음속 위시리스트를 보면서 선뜻 집어들지 못했다. 언제가 읽어야지 하면서도 현실적인 시간의 제약을 생각하고 손을 다시 회수한 것이다. 독서마저 일의 연장선에서 마주하다 보니 재미로서 독서는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전자책을 기본 독서 플랫폼으로 삼으면서 내 머리가 좀 열리기 시작했다. 낯선 장르나 싫어하는 테마도 기분에 따라 과감하게 선택한다. 또 책을 읽다가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저자의 다른 책을 바로 구매해서 일단 듣기 시작한다.

우연히 집어든 책이 재미있으면 공돈을 얻은 기분이다. 특히 마음에 드는 작가가 책 속에서 소개한 책은 즉시 전자책에서 사서 듣는다. 이렇게 발길 닿는대로,손 가는대로 책을 만나는 지그재그 연결 독서가 참 좋다.

'아무튼 술(김혼비)' 은 올 가을에 주말 밤 자기 직전에 별 생각없이 골랐던 책이다. 술이야기야 언제든지 들어도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구라 테마가 아닌가. 특히 코로나로 우울하기짝이 없는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흥을 돋울 수 있는 독서가 필요하다.

김혼비(필명)작가의 ‘아무튼 술'과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김작가는 얼굴 노출을 하지 않는다.
김혼비(필명)작가의 ‘아무튼 술'과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김작가는 얼굴 노출을 하지 않는다.
도입부 부터 작가의 맛깔스럽고 유머가 넘치는 술 구라에 푹 빠졌다. 술에 얽힌 에피소드도 재미있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다양한 캐릭터를 묘사하는 솜씨가 탁월했다. 독서중 진짜 짜릿한 반전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인 나로 인해 일어났다.

잠이 들기 전에 서문을 전자책의 TTS로 조금 듣다가 초반부를 놓치고 곯아떨어졌다. 새벽에 잠을 깨어 중반부부터 이어 들었는데, 작가가 문학 모임에서 만난 술 친구와 죽이 맞아 그 친구의 반지하방에서 보드카를 새벽에 마시는 대목이었다.

이어 작가가 그 술 친구와 술 궁합이 너무 잘 맞아 아예 동거를 시작하는 스토리로 전개됐다. 비몽사몽간에 ‘작가가 성소수자 인가보다’하면서 다시 잠에 떨어졌다.

아침 출근길에 놓친 부분을 다시 들으니 아뿔싸 저자가 30대 여성 작가였다. 술 테마는 으례 중장년 남성의 전용 테마라고 생각한 나의 편견이 글 전체를 오독했던 것이다. 다시 찬찬히 들으니 ‘술의 노래(최명)’, ‘내가 만난 술꾼 (임범)’, ‘명정사십년(변영로)' 등 이전에 읽은 술 테마 책과 다른 묘한 매력이 있었다.

저자의 찰진 글솜씨에 반해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바로 구매했다. 술 테마 만큼이나 축구 이야기를 빚는 스토리텔링 솜씨가 좋아 김혼비 작가의 팬이 된 것이다.

‘메모 독서법’(신정철)을 읽으면서 꽤 많은 책을 건졌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접하고 미국 글쓰기 베스트셀러를 왜 이제야 접했나 싶었다.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를 통해 스티브 존슨이라는 탁월한 과학 스토리텔러를 발견하고 메모 독서법에 무척 감사했다. 아사다 스구루의 한 줄정리의 힘으로 연결된 것도 메모 독서법 덕분이다.

논픽션 장르를 좋아하는데 전자책 논픽션 분야 책을 뒤지다가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메러디스 메이)'를 선택했는데, 진흙에서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전체 맥락은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라면서 겪는 슬픈 가족사다.

하지만 양봉가인 외할아버지가 키우는 꿀벌이 가족을 이어주고, 사연과 사연을 이어주는 스토리의 독특함이 색다른 재미를 준다. 또 지난해 읽었던 논픽션 ‘힐빌리의 노래(J.D 반스)’와 비슷한 유형의 논픽션이라 생각했는데 번역자가 동일인(김보람)이었다. 아마도 김보람의 번역서를 앞으로 찾아서 읽을 듯하다.

오르한 파묵의 책은 역사 소설가 손정미 작가의 추천으로 접했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스티븐 킹)'을 소재로 북토크 팟캐스트에 우연히 손작가를 초빙했다. 그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추천했는데, 전자책 서점에서 올라온 ‘빨강 머리 여인’과 ‘검은 책’을 읽었다. 터키작가의 소설을 처음 만났기에 처음에 낯설었지만 점차 파묵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역사에 뛰어든 세계사(김영진)’에 돈키호테 편을 읽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2’ 소설을 다시 들었다. 에스파냐의 역사배경을 충분히 접한 뒤에 소설을 읽으니 등장 인물의 캐릭터가 더 생생하게 살아났다.

사실 나에게 돈키호테는 어릴 때 동화 스타일로 읽었던 돈키호테의 한 대목뿐이었다. 2권짜리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비로소 세르반테스가 왜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근대 유럽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대문호인지를 실감했다.

2021년에 어떤 책이 나의 손길, 발길을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엔돌핀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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