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전기차 2위 폭스바겐이 배터리 내재화(자체생산)를 선언했다. 내재화 전략의 핵심은 파우치형 배터리를 배제한 각형 배터리 확대 채택이다. 그동안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급한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등 K배터리에 등을 돌린 선택이다.

하지만 배터리 업계 일각에서는 폭스바겐이 주요 배터리 공급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기차 가격을 내리려면 차량 가격의 30~40%를 차지하는 배터리 공급 단가를 낮춰야 하는데, 폭스바겐이 갑의 자리를 차지한 배터리 업체를 압박해 ‘갑을 관계’ 역전을 노린다는 것이다.

22일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폭스바겐의 각형 배터리 내재화 선언이 시장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는 어렵다"며 "이번 발표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에 협상 우위를 가져가기 위한 협박성 액션에 가깝다"고 밝혔다.

헤르베르트 디스(Herbert Diess) 폭스바겐CEO / 폭스바겐 파워데이
헤르베르트 디스(Herbert Diess) 폭스바겐CEO / 폭스바겐 파워데이
헤르베르트 디스 폭스바겐 CEO는 15일(이하 현지시각) 열린 ‘파워데이’에서 2023년부터 ‘통합형 셀’ 배터리를 사용하고 2030년까지 80%로 비율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지분을 가진 노스볼트를 통한 내재화 추진으로 유럽 전기차 밸류체인 통합 전략에 속도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계획에 따르면 2025년부터 K배터리의 폭스바겐 내 점유율은 하락할 전망이다.

각형은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제조하는 파우치형 대비 생산 난이도가 낮고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폭스바겐은 보급형 모델에서 최대 50%의 배터리 비용 절감을 목표로 한다. 직접 생산하거나 저렴한 중국 업체를 통해 배터리 가격을 낮추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이 계획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노스볼트는 설립 5년차 기업으로 최근에야 생산 걸음마를 뗐다. 특히 폭스바겐이 주력으로 삼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기술은 파우치형 및 원통형 대비 주행거리가 적어 중대형 전기차에는 적용이 어렵다. 폭스바겐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술 확보 및 생산성 향상이 가능할지에 물음표가 붙는다.

SK이노베이션 연구원이 파우치형 배터리 셀을 들고 있다. / 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 연구원이 파우치형 배터리 셀을 들고 있다. / SK이노베이션
처음부터 배터리 형태를 원통형으로 일원화 한 테슬라 사례도 있지만, 현대차처럼 파우치형과 각형 배터리를 혼용 중인 경우도 있다.

현대차는 E-GMP 2차 입찰(2022년 아이오닉6 탑재)에서 중국 CATL(각형)과 LG에너지솔루션(파우치형)을, 3차 입찰(2023년 아이오닉7 탑재)에서도 CATL(각형)과 SK이노베이션(파우치형)을 선정했다. 폭스바겐 역시 현대차처럼 지역별 생산 라인에 따라 다른 형태의 배터리를 탑재할 수 있다는 얘기다.

폭스바겐이 각형(80%) 외 나머지 20%는 파우치형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힌 점을 봐도 K배터리에 충분한 기회가 남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각형 배터리 내재화 계획이 순조롭지 않을 경우 파우치형 비중을 늘릴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또다른 독일 완성차 기업 BMW는 17일 폭스바겐과 달리 전기차용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지 않기로 했다. 글로벌 배터리 기업에서 공급 받는 배터리로 차량을 만들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BMW는 한국·중국 내 배터리 제조기업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보유하고 있어 자체 배터리 생산 설비를 구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내재화를 위해 투입할 대규모 비용을 전기차 연구개발에 활용해 시장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간 배터리 소송전이 폭스바겐의 전기차 생산계획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면서 최근 파워데이를 통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폭스바겐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결정으로 SK이노베이션 미 조지아 공장에서 생산된 배터리를 2년동안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합의에 이를 경우 적어도 북미시장에서 만큼은 전기차에 파우치형을 지속 탑재할 가능성도 큰 셈이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폭스바겐이 중국 외 지역에서도 각형만 고집하며 CATL과 노스볼트만 믿고 공급망을 구축하기에는 협상력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다"라며 "LG와 SK 간 배터리 분쟁 해소와 각사의 협상력에 따라 폭스바겐의 전략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