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 "경제안보 채널 없는 탓"
일본·대만 이미 발 벗고 나서

중국으로 산업 기술 유출이 가속화 하는 가운데 우리 정부의 늑장 대응이 도마에 오른다. 중요 기술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거나 사전에 민간과 의사소통하는 경제안보 채널을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일본 등 다른 나라의 안보채널 가동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의 핵심 기술은 상당히 수월하게 중국 등 해외로 유출될 수 있다.

10일 산업계에 따르면 최근 하이닉스반도체(SK하이닉스의 전신)에서 나온 국내 중견 시스템 반도체 기업 매그나칩반도체가 중국으로 매각하는 과정에서 민·관이 보조를 맞춰 중요 기술 유출을 막는 협의체 구축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매그나칩반도체 경북 구미 공장 전경 / 매그나칩반도체
매그나칩반도체 경북 구미 공장 전경 / 매그나칩반도체
뉴욕거래소에 상장한 매그나칩반도체는 3월 29일 자사 미국 본사 주식 전량을 중국계 사모펀드인 '와이즈로드캐피털'과 관련 유한책임출자자들에게 매각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매각 거래 규모는 14억달러(1조6000억원)에 달한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반도체 굴기’에 나선 중국이 토종 반도체 기업 인수로 기술 유출을 재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2003년 SK하이닉스의 전신 현대전자 LCD사업부에서 나온 국내 LCD 기업 하이디스 인수 후 핵심 기술과 인력을 얻어 중국 디스플레이 1위 기업 BOE를 육성했다"며 "중국 기업이 국내 기업 인수로 기술만 빼내 청산하는 사례가 여러차례 있었기에, 기술 유출 우려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기업 매각이나 M&A(인수합병)는 반드시 산업통상자원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매그나칩반도체에 기술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국가핵심기술 보유 여부를 심사 중이다. 앞서 하이닉스에서 분사됐던 매그나칩반도체는 2009년 미국계 사모펀드 애비뉴캐피털에 매각됐을 당시 정부 승인을 받았다.

홍남기 국무총리 직무대행(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월 2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정부는 매그나칩 문제에 대해 엄중하게 보고 있다"며 "디스플레이 분야의 국가핵심기술 보유 여부에 대한 판단에 따라 (매각 여부가) 통제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매그나칩의 주력 생산품인 OLED 패널 구동칩은 첨단 제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부가 이를 국가핵심기술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민간의 M&A 시도를 무리하게 막아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핵심인재 유출과 M&A 등 중국의 노골적인 한국 기술 탈취가 지속되면서 정부가 기술 유출 문제에 보다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과 대만은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 수위를 높이며 우리 정부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국가안보국(NSS), 경제산업성 등 관계 부처와 경제단체연합회 등 주요 경제단체가 참여해 경제안보 문제를 협의하는 채널을 연내 가동할 예정이다. 반도체, 통신·IT, 원자력 등 중요 분야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에는 경제안보 담당 임원을 별도로 두도록 요청한다.

대만 정부는 대만인의 중국 대륙 내 취업을 엄격히 제한하기로 했다. 인력 업체가 중국 일자리를 소개하거나 광고하는 것을 금지하고, 위반할 경우 최고 500만대만달러(2억원)의 벌금을 물린다. 중국이 독자 공급망 구축을 위해 연구·개발 경험이 풍부하고, 같은 언어를 써 관리가 쉬운 대만 반도체 인재를 빼내려 해서다.

산업계는 우리 정부도 국가핵심기술과 첨단기술을 국외로 유출할 수 없도록 경제안보 채널을 구축하거나 다소 강도높은 제재도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가 경쟁력 훼손 방지는 물론, 중국과 기술 전쟁을 펼치는 미국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중 패권 경쟁 구도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의 중국 매각은 더이상 민간기업 만의 문제가 아니며, 정부의 관리 능력 부재가 도마에 오를 수 있다"며 "중요 기술의 경우 보호해야 할 기술범위를 확대하고, 반도체 굴기를 공표한 중국 보다는 국내 기업들에 우선 매각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