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PC부품 유통구조, 이제는 바꿔야 한다

최용석 기자
입력 2021.06.11 06:00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대로 접어들면서 재택근무, 원격수업은 물론, 게임을 비롯한 여가, 엔터테인먼트 용도의 PC 수요가 급증했다. 하지만 데스크톱 시장을 이끄는 조립PC 수요는 주춤했다. 조립 PC의 가격이 평소 대비 2배 이상 상승했기 때문이다.

특히 게임용 PC의 핵심 부품인 ‘그래픽카드’의 가격이 급등한 것이 결정타다. 역대 최고의 암호화폐 호황으로 인해 암호화폐 채굴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로 인해 개인 소비자들이 써야 할 그래픽카드가 채굴 시장으로 대거 끌려 들어갔다.

쓸만한 그래픽카드 가격은 최소 100만원에서 비싸게는 300만원대로 껑충 뛰었다. 그 피해는 그래픽카드를 구하지 못해 PC를 팔 수조차 없게 된 영세 조립 PC 업체와 너무도 올라버린 그래픽카드 가격 때문에 아예 구매를 포기해버린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 결국 국내 조립 PC용 부품 유통 시장의 고질적인 병폐가 최악의 형태로 드러난 꼴이 됐다.

국내 조립 PC 유통시장의 불합리한 구조는 이전에도 꾸준히 지적된 바 있다. 가뜩이나 시장규모도 크지 않은 나라에서, 제조·수입사를 시작으로 최종 소매점에 이르는 사이에 거치는 중간 단계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커뮤니티에서 수시로 회자하는 ‘YSRP’라는 말이 있다. ‘권장 소매 가격’을 뜻하는 MSRP(manufacturer's suggested retail price)의 첫 글자를 용산을 뜻하는 ‘Y’자로 바꾼 것으로, 해외에서 적정 가격에 출시한 PC 부품이 국내에 들어오면 20%~30%쯤 더 비싼 가격이 책정되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다른 말로 ‘용산 프리미엄’이라고도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부가세와 수입 및 유통에 따르는 최소한의 부대비용 외에, 매 유통 단계마다 꼬박꼬박 붙는 추가 마진 때문이다.

이처럼 비효율적인 유통구조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국내 PC 부품 시장의 구조가 과거 오프라인 판매 위주였던 10~20년과 비교해서 변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제조·유통사-총판-대형 대리점-중간 대리점-지역 대리점-소매점 순으로 다단계에 걸쳐 물건을 주고받는 구조는 온라인 유통이 대세가 된 지금도 거의 바뀌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런 구조에서는 오랜 유통 경력으로 성장한 총판과 대형 대리점들이 제조·수입사보다 입김이 센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제조·유통사가 제품을 싼값에 들여와도, ‘일부’ 중간 유통상들이 ‘오픈 프라이스’를 빌미로 가격을 올려버리면 막을 수 없다. 이번 그래픽카드 가격 폭등도 ‘일부’ 중간 유통상들이 최종 소매점이나 소비자가 아닌, 채굴업자에 맞춰 가격을 책정한 바람에 일어난 결과다.

이러한 유통구조는 더 늦기 전에 개선해야 한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지난해 9월, 지포스 30시리즈의 첫 제품인 ‘지포스 RTX 3080’이 국내 처음 출시됐을 때 벌어진 ‘쿠팡 직판’ 사건이 그 답이다.

당시 A사 그래픽카드를 국내 수입하는 I사는 지포스 RTX 3080 그래픽카드 초도 물량 전부를 중간 유통상이 아닌, 쿠팡을 통해 몽땅 직판해버렸다. 최소 120만~130만원이 책정될 것으로 예상했던 제품이, 99만원이라는 기적적인(?) 가격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다른 제조·수입사들도 하나둘씩 동참하면서 소비자들은 모처럼 프리미엄 없는 ‘합리적인’ 가격에 최신 그래픽카드를 구매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비자들은 PC 부품 가격이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거품이 끼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제조·수입사들도 중간 유통상을 최대한 거치지 않는 것이 적지 않은 홍보 효과와 브랜드 인지도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부품 제조·수입사들이 이전까지 중간 유통상들에게 제품을 넘겼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유통망과 물류시스템 등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직접 유통망과 물류 시스템을 갖추기에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라인 커머스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쿠팡처럼 자체적인 유통망과 물류시스템을 갖춘 대형 판매 플랫폼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굳이 오프라인 시절의 비효율적인 기존 유통망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와서 기존 유통망을 의지해야 할 이유는 ‘관행’이라는 핑계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기존 유통 생태계 속에는 적지 않은 영세 업체들도 포함되어있다. 위의 ‘쿠팡 사건’ 당시 기존 유통상들이 내세운 반발 이유도 ‘소상공인 보호’였다. 그러나, 최종 소매점과 소비자들에게 되레 피해만 주고, 중간 유통상만 배를 불리는 현재의 유통 구조를 더 이상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픽카드 대란 장기화로 인해 ‘보릿고개’를 버티지 못한 영세 업체들의 상당수가 자연스레 정리된 상황이다. 지금이야말로, PC 부품 유통 구조를 최소한의 피해로 첨단 디지털 상거래 시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재편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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