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최근 매분기 기록적인 실적에도 웃지 못했다. 오히려 투자와 인수·합병(M&A) 등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삼성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수 공백에 따른 컨트롤타워 부재가 경영에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13일 가석방으로 풀려나면서 삼성 내부는 안도하는 분위기다. 대규모 투자를 위한 의사결정이 빨라져 삼성전자 경영이 본궤도에 오를 것이란 기대감이 커진다. 200조원이 넘는 막대한 실탄을 투입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9년 7월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는 모습 / 조선일보DB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9년 7월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는 모습 / 조선일보DB
10일 삼성전자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유동자산 총액은 1분기 말 기준 209조1600억원이다. 2020년 말(198조2200억원) 대비 10조9400억원이 늘었다. 유동자산은 기업이 1년 내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의 합계치를 뜻한다.

삼성은 2016년 삼성전자가 9조4000억원에 하만을 인수한 후 조 단위 M&A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1년 내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 총액은 1분기 말 기준 209조16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다.

삼성은 2016년 삼성전자가 9조4000억원에 하만을 인수한 뒤, 조 단위 M&A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투자를 지체하는 동안 파운드리 1위 대만 TSMC와는 점유율 격차가 더 벌어졌다.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3위 글로벌파운드리 인수에 착수하며 삼성전자를 압박하고 있다.

주력인 메모리 부문에서도 미국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가 각각 176단 낸드와 DDR5 D램의 기술 개발과 생산에서 삼성전자를 앞지르는 등 삼성전자의 초격차 지위가 흔들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재계는 이 부회장의 경영 복귀 현실화로 170억달러(19조원) 규모의 미국 내 파운드리 증설 종착지도 빠르게 정해질 수 있을 것으로 관측한다.

삼성 관계자는 "미국 내 투자 조건뿐 아니라 이 부회장의 부재로 최종 의사결정이 늦어진 측면도 있다"며 "이 부회장의 복귀로 의사 결정이 빨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10월 베트남 하노이 인근에 위치한 삼성 복합단지를 찾아 스마트폰 생산공장 등을 점검하는 모습 /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10월 베트남 하노이 인근에 위치한 삼성 복합단지를 찾아 스마트폰 생산공장 등을 점검하는 모습 /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증설 외 다른 대형 투자나 M&A가 추진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차량용 반도체 업체인 네덜란드 NXP나 독일 인피니언 등을 유력한 인수 대상으로 본다. NXP와 인피니언 경우 50조~60조원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 제조사인 삼성SDI의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미국 진출안들이 빠른 시일 내 나올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SDI는 국내 배터리 3사 중 유일하게 미국에 신규 배터리 공장을 짓지 않았고, 완성차 기업과 합작법인 설립도 나서지 않은 상태다.

핵심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이 부회장의 적극적 경영 행보도 예상된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5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과 단독 회동하며 차세대 배터리 협력을 논의한 바 있다. 삼성SDI가 현대차와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동력을 다시 얻게 된 셈이다.

네덜란드산 ‘한정판’ 극자외선(EUV) 노광기를 확보하려는 반도체 업계의 경쟁이 본격화 한 가운데 이 부회장의 경영 복귀가 시사하는 바도 크다. 삼성전자는 EUV 장비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ASML과 공정 단계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ASML은 최근 총 2400억원을 들여 경기도 화성에 첨단 EUV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트레이닝 센터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이 부회장은 네덜란드 ASML 경영진을 직접 만나기 위해 2020년 10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을 찾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법무부 장관이 예외를 승인하지 않으면 가석방 된 이 부회장이 공식 등기 임원으로 경영 활동을 하기에는 제약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있다. 취업제한 규정에 따라 이 부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 부회장이 적극적인 경영에 나서는 것이 법무부 가석방 조치 의중에 부합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9일 이 부회장 가석방에 대해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 상황과 글로벌 경제환경에 대한 고려 차원에서 이 부회장이 대상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재계는 이 발언을 국가 경제에 이 부회장이 경영활동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13일 석방 후 가까운 시일 내 국내외 출장 등 경영행보를 할 것으로 보인다"며 가석방에 대한 반대 여론도 있는 만큼, 경영 정상화는 물론 대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활동에도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