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나로크의 아버지’ 김학규 IMC게임즈 대표 인터뷰

"1997년 그라비티라는 팀을 만들었어요. 이런저런 초안을 만들고 외주를 하면서 계속 RPG(역할수행게임)를 만들기 위한 기반을 쌓았죠. 학원 졸업생들과 지하실 방에서 같이 작업했습니다. 중2병 같은 감성을 잔뜩 넣어서 굉장한 대작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모아놓은 돈도 없고, 수입은 가끔 외주를 받아서 벌어오는 정도였습니다. 반은 그냥 취미 생활이고, 반은 헛된 무모한 도전이었죠."

김학규 IMC게임즈 대표. /임국정 기자
김학규 IMC게임즈 대표. /임국정 기자
13일 서울 강남에 있는 IMC게임즈 본사에서 만난 김학규 IMC게임즈 대표는 PC용 RPG 게임 악튜러스 개발 당시의 추억이 떠올랐는지 웃으며 말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악튜러스 출시(2000년) 당시 만 27세의 젊은 청년이었던 그는 어느새 ‘반 백살’(49세)의 중년이 됐다. 장난기 있어 보이던 얼굴은 대표의 책임감 때문인지 다소 무거워진 듯 보였다.

김학규 대표는 1세대 게임 개발자다. 1990년대 초반부터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리크니스’, ‘라스 더 원더러’, ‘개미맨2’ 등의 액션 게임이 그의 손을 거쳤다.

대학 시절 그는 제대로 된 RPG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가득했다. 결국 서강대학교 수학과를 중퇴하고, 본격적으로 RPG 게임 개발에 나섰다. 컴퓨터 학원 강사로 일하며 인연을 맺은 학생들이 그와 함께였다. 게임 개발사 그라비티의 시작이다.

그라비티의 첫 작품은 악튜러스다. 김 대표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 만든 첫 RPG 게임이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적은 수의 사람들이 열정 하나만으로 만든 게임이기 때문이다.

악튜러스는 당시 게임 업계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손노리와 함께 제작했다. 표절 의혹, 폭력성·선정성 논란 등 홍역을 치렀지만, 방대한 스토리와 세련된 3D 그래픽, 아름다운 배경음악 등으로 게임 이용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서만 5만장이 넘게 팔렸다. 일본으로 수출돼 출시 3일만에 2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온라인 게임은 만들기 시작하면 1기 개발팀, 2기 개발팀 등 게임에 손 댄 이들이 거의 몇 천 명을 넘어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악튜러스는 다 해봐도 100명이 안 돼요. 꿈은 이따만한데(큰데) 현실은 요만한(작은) 사람들이 어찌어찌 (개발)해가는 그런 거였죠."

라그나로크의 성공과 그라비티 퇴사

악튜러스의 성공 후 그는 차기작으로 ‘라그나로크 온라인’을 준비했다. 악튜러스를 개발한 게임 엔진을 개량해 만든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이다. 2002년 출시된 라그나로크는 이후 60여개국에 서비스가 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정작 그라비티 팀을 설립한 김학규 대표는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소유권 때문이었다. 김 대표는 악튜러스 개발이 생각보다 늦어지자 당시 김정률 한국게임제작협회 회장 겸 어뮤즈월드 회장의 투자를 받았다. 그라비티 팀이 주식회사 그라비티로 법인화된 배경이다. 김정률 회장이 80% 정도의 지분을 가져간 반면, 나머지를 김 대표와 일부 관계자 나눠가졌다.

"무조건 게임(악튜러스)을 완성시키고 싶었어요. 20%의 지분도 못 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이가 20대 후반 정도였으니까 투자라든가 경영 같은 부분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죠. 게임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습니다. (회사를) 갖다 바친 셈이었죠. "

김 대표는 2002년 라그나로크 상용화 이후 그라비티를 퇴사했다. 그라비티 대주주로 있던 김정률 회장은 2005년 자신과 가족이 가진 그라비티 지분 52.4%(364만주)를 일본 소프트뱅크 계열 투자회사 EZER과 테크노 그루브(Techno Groove)에 전량 매각했다. 매각액은 약 4000억원에 달했다.

김 대표에게 김정률 회장과 갈등이 있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물었다. "일단 내가 어렸던 이유가 제일 컸던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간을 되돌려 제대로 된 계약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고, 구조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는 지나간 일에 연연하기보다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다 성숙한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구 때문에 내가 이랬다고 말하기는 그렇죠. 어쨌든 지금 있는 것은 됐고, 저는 10여년 만에 게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만들어 보는 경험을 해봤으니까 제대로 된 투자를 받아서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새로운 기회를 찾게 된 거죠."

IMC게임즈가 게임을 많이 만들지 못하는 이유

김학규 대표는 2003년 한빛소프트의 투자를 받아 IMC게임즈를 설립했다. IMC게임즈는 이후 ‘그라나도 에스파다’, ‘트리 오브 세이비어’ 등의 작품을 내놨다. 두 작품 모두 발표 당시부터 큰 관심을 모으며 해외에서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특히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2006년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굴곡을 겪었다.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일부 운영진이 게임에 직접 개입해 문제가 된 일명 ‘노토리우스당 사건’으로, 트리 오브 세이비어는 버그와 최적화 등 완성도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와 관련해 김 대표는 회사 내부 단속을 잘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고 더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회사의 역량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그는 "게임 운영을 조심히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라고 한 (게임 이용자들의) 경고의 목소리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IMC게임즈는 ‘트리 오브 세이비어 모바일’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김 대표는 "트리 오브 세이비어 모바일은 사실 만들기 시작한 지 오래되다 보니 좀 올드한 부분이 있다"며 "지금 유저들이 제일 원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계속 다듬고 있는 중이다"고 밝혔다.

‘트리 오브 세이비어 모바일’ 관련 이미지. /IMC게임즈 홈페이지
‘트리 오브 세이비어 모바일’ 관련 이미지. /IMC게임즈 홈페이지
김 대표는 IMC게임즈의 고질적 문제로 많은 게임을 못 만든다는 사실을 꼽았다. 이유는 이미 만들어 놓은 게임들의 서비스를 중단없이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운영해보고 잘 되지 않으면 서비스를 접는 게임사가 넘쳐나는 시대다. 그런 운영 방식이 그의 신조인지 물었다.

"저희는 게임을 서비스하면 안 접거든요. 유저들과 당연한 약속이라고 생각해요. 유저들은 온라인 게임이라는 것을 한번 시작하게 되면 시간이든 돈이든 많은 내 삶의 일부를 거기에 갖다 넣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임이 내가 아닌 남의 결정으로 쾅하고 문 닫는다면 전 못 받아들일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서비스를 적어도 최대한 할 수 있을 때까지 가지고 간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김 대표의 의지와 달리 일부 국가에서는 현지 퍼블리셔 사정으로 인해 게임 서비스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최대한 데이터를 넘겨받은 뒤 새로운 서버를 열어 보상을 하는 등 어떻게든 버리지 않고 끌고 가능 방식으로 운영해 왔다.

하지만 게임 운영은 서버만 켜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업데이트도 계속 되어야 한다. 오래된 게임은 꾸준히 유지보수할 신규 인력 찾기도 쉽지 않다. 그는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 서비스를 관리해야 한다"며 "어떻게 보면 좀 바보 같이 운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밝혔다.

IMC게임즈는 마케팅 팀이 없는 조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채용 안내에 "고객의 눈을 잠시 사로잡을 수 있는 현란한 광고나, 언론사 로비를 통해 인기 없는 게임을 굉장한 대작인 것처럼 알리는 것이 마케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IMC게임즈와는 맞지 않다"고 적시해 두고 있다. 김 대표는 "마케팅이 할 수 있는 일은 안에 있는 가치를 끄집어내서 사람들이 알게 하는 일이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한다"며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해봤자 오래 갈 수도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라그나로크를 예로 들며 결국 게임사의 기본은 좋은 게임을 만드는 일임을 강조했다. 그는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거치면서 라그나로크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가하는 상황을 직접 지켜봤다.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의 동생이 회사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고, 해외에서도 라그나로크가 인기를 끌었다. 이를 통해 그는 "정말 알아서 스스로 퍼져나갈 수 있는 뭔가를 만들면 알아서 사람들이 퍼다 주는구나"라는 사실을 몸소 느꼈다.

"잘 만든다의 기준은 결국 그 사회의 시대상과 연관이 있어요.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 퍼져나가는 초창기에 세상이 필요로 한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제가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마케팅이 안 돼서 고민이라고 하면 지금 시대의 사회가 원하는 것을 만들고 있는가를 먼저 고민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1세대 게임 개발자, 현재의 한국 게임 산업에 말하다

1세대 게임 개발자로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김학규 대표에게 한국 게임 산업의 현실에 대해 물었다. 한국 게임 산업의 대표적 문제로 지적되는 사안 중 하나는 ‘지적재산권(IP) 우려먹기’다. IP 하나가 성공하면 이를 제목으로 내건 비슷한 게임이 쏟아져 나온다. 신작 IP는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상황과 대조적이다.

김 대표는 그 원인을 게임의 산업화에서 찾았다. 게임 시장이 커지며 산업적으로 접근하다보니 IP를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기존의 IP를 활용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반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창세기전 등 초창기 게임 개발자들은 게임을 산업으로 생각하고 체계적으로 접근한 사례는 아니었던 것 같다"며 순수한 창작 욕구가 신작 개발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IP를 창작하려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남들이 하는 것처럼 IP만 그냥 외주 개발하듯 만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더 넓게 보면 그런 일(기존에 있는 괜찮은 IP를 가지고 비슷한 게임을 만드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이미 있거든요. 중국 스튜디오들이 이미 잘하기 때문에 한국이 그런 식으로 한다고 해서 경쟁력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IP를 창출하려는 능력 자체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한국 게임 산업이 확률형 아이템, 대체불가토큰(NFT), P2E(Play to Earn) 등 소위 돈 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와 관련해서는 "산업이 돈을 버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 좀 어폐가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산업이 돈을 벌지 못하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게임의 본질은 재미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재미없는 게임을 P2E 방식으로 만들어서 돈을 벌게 만드는 것은 초창기에 잠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결국 게임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NFT의 핵심은 탈중앙화고 분권화임을 강조하면서 무늬만 NFT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게임 재화의 소유권을 유저가 갖게 되는 건 의미가 있다"며 "진짜로 NFT를 해서 게임 사업을 하려면 극단적으로는 게임 서버와 클라이언트를 오픈소스로 풀 각오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사행성 논란뿐 아니라 게임 중독, 폭력성, 선정성 등 게임에 대한 우려는 현실 속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김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게임의 존재 가치를 ‘정신적 패스트푸드’에 비유했다. 아주 고급진 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적으로 배고픈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위안이 될 수 있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물론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김 대표에게 게임사 대표이자 게임 개발자로서의 신념을 물었다. 그는 "‘내가 만들고 있는 게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한가. 혹시 내가 이 사회에 독이 되는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문을 스스로 계속하고 있다"고 답했다.

"진짜 정직하게 우리 아들, 딸이 게임을 한다고 했을 때 권할 수 있을 것인가. 제가 생각하는 기준은 그거에요. 제가 자식들에게 시킬 수 없는 수준이 되면 만들면 안 되는 거니까요."

임국정 기자 summer@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