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가상자산 업계의 자금추적을 위한 글로벌 수칙인 트래블룰이 시행 한 달을 맞는다. 글로벌 기준이지만 시행국은 한국이 최초다. 글로벌 경제가 신 기술을 중심으로 급격한 변곡점에 선 지금, 트래블룰 적용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이 첫 타석에 올랐어야 할 만큼 시급한 것이었는지, 준비는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달린다. IT조선은 트래블룰 시행 과정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앞으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 지 짚어봤다.

가상자산 업계의 여행자 규칙, 트래블룰(Travel Rule)이 3월 25일 시행됐다. 이제 국내 투자자들은 100만원 이상의 가상자산을 주고 받을 때 자신과 받는 사람의 신원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이 과정이 꽤 복잡하고 원활하지 않아 여기저기서 불만을 호소하고 있다. 가상자산 거래소마다 트래블룰 정책이 다르고, 코인을 보낼 수 있는 거래소도 정작 몇 안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편에 대해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기술적으로 글로벌 기준이 완벽하지 않은 갖춰지지 않은 가운데, 금융위원회를 비롯, 정부와 정치권이 보여주기식 단기적 성과를 내는데 급급한 결과라는 것이다.

자금세탁방지국제지구(FATF) 회의 모습 / FATF 페이스북
자금세탁방지국제지구(FATF) 회의 모습 / FATF 페이스북
트래블룰, 자금세탁 방지 위한 FATF 권고안…취지는 좋지만

트래블룰이란 돈이 여행하는 경로를 추적하는 제도를 말한다. 트래블룰이 시행되면 사업자들은 서로 가상자산 송수신자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시스템을 구축한 후 송금 정보를 보관, 정부에 보고한다. 여권에 해외 입출국 기록이 남듯, 정부는 트래블룰을 기반으로 코인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트래블룰을 이해하려면 우선 자금세탁방지국제기구(FATF, Financial Action Task Force)가 진행하는 상호평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 FATF는 1989년 OECD 산하 국제기구로 설립됐다. 국경을 초월해 발생하는 금융범죄를 예방하자는 목표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발생 후 미국이 자금세탁 규제를 강화하면서 FATF의 위상이 높아졌다.

FATF의 주요업무는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권고안을 마련하고 상호평가를 주관하는 것이다. 회원국은 FATF 권고안을 자국의 제도로 수용할 의무를 진다. 회원국들은 서로 권고안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한다. 자료 검토는 물론, 필요하면 현장 실사도 진행한다. 이것이 상호평가다. 상호평가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금융 비용과 환거래에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

"글로벌 자금세탁방지 기준 갖추자"...밀어붙인 정부

FATF의 상호평가는 자금세탁방지 주관 부처의 업무 성과를 가늠하는 주요 지표가 됐다. 우리나라는 회원가입한 2009년에 이어 지난 2018년 또 한 번 상호평가를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말이 많았다. 정작 FATF가 자금세탁 위험 요인으로 분류한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와 변호사와 회계사 등 비금융전문그룹에 대한 관리감독 규제안은 논의하지 않았다. 글로벌 기구가 지적한 힘있는 사람들은 쏙 빼놓은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가상자산 사업자를 자금세탁방지의무 대상에 넣었다. 이때 정부가 내놓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 상호평가 대응방향’ 자료에 따르면 "가상통화 등 새롭게 부상한 자금세탁 위험에 대해서 제도개선을 적극적으로 이행할 경우, 좋은 평가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의 특정금융법(특금법) 개정안이 2019년 3월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발의됐다. 이후 정부는 본회의 통과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소속인 권대영 금융정책국장(당시 금융혁신단장), 김근익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당시 FIU 원장)이 언론과 세미나를 통해 법안 통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트래블룰이 특금법 시행령에 구체화된 시기는 2019년 10월이다. FATF 상호평가가 끝난 직후다. 이듬 해 3월 은성수 전 금융위원장 재직시절, 특금법이 본회의 문턱을 넘으면서 트래블룰 시행 기틀이 마련됐다.

이듬해 FIU는 상호평가 2등급의 양호한 성적표를 받는다. 29개국 중 미국, 호주, 캐나다, 중국 등 18개국도 같은 등급을 받았다. FATF는 "대한민국이 가상자산 관련 위험을 식별하고 범정부 차원에서 이에 대응하는 것은 특히 긍정적"이라고 평했다.

지난해 김정각 FIU 원장은 국제 컨퍼런스에서 "FATF 상호평가에서 견실한 법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긍정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며 "가상자산 사업자를 대상으로 한 첫 규제 사례임에도 현재까지 큰 시장 혼란 없이 안착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자평했다.

글로벌 권고안도 아직 미완의 기술력…가이드라인 놓친 정부

문제는 FATF의 가상자산 규제 권고안도 아직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FATF가 트래블룰 시행을 권고했던 2019년 6월,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블록체인으로 수신자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며 기술적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잇따라 제기됐다. 같은 시기 전세계 블록체인협회로 구성된 V20은 트래블룰 재검토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FATF는 지난해 10월 트래블룰 수정안을 발표했다. 최초 권고안을 낸지 2년 4개월 만이다.


하지만 수정안 역시 기술적 변화를 완벽하게 반영하지는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FATF가 업계 의견을 반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의의가 있다는 것. 이는 트래블룰 시행이 그만큼 까다롭고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트래블룰이 시기상조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우리 정부는 국제 규약이 뼈대를 갖추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법률을 마련하고 시행을 강행했다. 이 때문에 현행 트래블룰 제도는 FATF 수정 권고안을 담고 있지도 않다.

전문가들은 안정적인 제도 정착을 위해 정부가 트래블룰 표준안과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적어도 FATF와 보조를 맞춰야지 않느냐는 것이다. 김근익 원장 시절 FIU는 트래블룰 시행 관련 연구용역을 실시하며 표준안 마련에 나섰지만, 고승범 금융위원장과 김정각 FIU 원장 취임 후 별다른 후속 조치 없이 지난 3월 25일 트래블룰이 시행됐다.

업계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이나 표준안을 마련한 후 트래블룰을 시행했다면 지금과 같은 수준의 시장 혼란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정부가 가상자산 시장을 육성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바다이야기와 같이 규제해야 하는 투기판으로 본 결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시장에 대한 이해, 이로 인한 산업 성장에 대한 철학과 의지가 부재한 현 상황이 안타깝다"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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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