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가상자산 업계의 자금추적을 위한 글로벌 수칙인 트래블룰이 시행 한 달을 맞는다. 글로벌 기준이지만 시행국은 한국이 최초다. 글로벌 경제가 신 기술을 중심으로 급격한 변곡점에 선 지금, 트래블룰 적용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이 첫 타석에 올랐어야 할 만큼 시급한 것이었는지, 준비는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달린다. IT조선은 트래블룰 시행 과정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앞으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 지 짚어봤다.

트래블룰 첫 시행에 따른 시행착오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해외사업자는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법 적용 대상인 국내 사업자에 대한 역차별 이슈는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이로 인한 시장 혼란은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제대로 된 대책 없이 법 적용을 밀어 붙인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이에 정부가 땜질식 처방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이 거세다. 한 곳을 막으면 다른 곳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효과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정부 방침에 해외 업체들은 모두 불법 사업자가 됐다. 국내 업체들은 대규모 비용을 들여 연동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국내 사업자간 코인 이동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고 하소연한다.

트래블룰 첫 타자 된 한국, 알트코인 ‘펌핑 앤 덤핑’ 기승

가상자산 시장은 대표적인 국경없는 경제(borderless economy) 분야다. 거래소나 개인 지갑으로 비트코인(BTC)을 전송하면 24시간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 시세 차이를 이용한 재정거래(Arbitrage)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전 세계에서 비슷한 시세가 형성된다.

반대로 어느 한 곳에서 입출금이 막히면 거래소 간 시세 차이가 커져 투자 위험도 늘어난다. 이 틈을 이용해 일부 세력이 코인 가격을 밀어 올리기 때문이다. 투심을 부추겨 개미들이 몰리는데 이를 ‘가두리 펌핑’이라고 한다.

트래블룰 첫 시행국가이면서 유일한 법 적용 국가이다보니 시장에서도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입출금이 일부 막히면서 알트 코인을 중심으로 가격이 급등락하는 펌핑 앤 덤핑 현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례로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서 3만7000원 선에서 거래되던 웨이브(WAVE)는 트래블룰 시행 후 일주일 동안 두배 이상 올라 지난달 31일 7만8900원을 찍었다. 그러다 다시 3주 정도 지난 18일 고가 대비 3분의 1 수준인 2만5000원 선까지 내려왔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서 거래되는 가상자산 웨이브(WAVE)의 ‘펌핑 앤 덤핑’ 그래프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서 거래되는 가상자산 웨이브(WAVE)의 ‘펌핑 앤 덤핑’ 그래프
국내 비트코인 시세가 해외보다 1% 가량 낮게 형성되는 ‘역김치 프리미엄’이 발생한 것도 같은 우려에서다. 이러한 시장 급변동과 시세 이상은 트래블룰 시행에 따른 부작용으로 일찌감치 제기됐던 문제들이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문제가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글로벌 자금이동 추적 시스템 국내 가상자산 시장에 적용…문턱 더 높아

트래블룰은 원래 기존 금융권에 적용되던 자금이동 추적시스템이다. 현재 국내외 은행들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전산망을 기반으로 송수신자 정보를 주고 받는다. 해외로 자금을 이체할 때 입력하는 은행 코드가 바로 스위프트 코드다. 현재 세계 200개국, 1만1000여개 금융기관이 스위프트에 참여하고 있다.

스위프트에 참여하려면 은행들끼리 진행하는 상호평가에서 적격 자격을 얻어야 한다. 이후 거래를 원하는 국가의 금융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그래야 해당 국가의 금융기관과 송수신자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다. 현재 글로벌 약 5000곳의 금융회사가 우리나라에 적격 기업 신고를 마친 상태로, 금융감독원 ‘파인(FINE)’의 ‘제도권 금융회사’ 카테고리에서 적격 기업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은행이 사용하는 스위프트 전산망처럼 가상자산 트래블룰도 해외 사업자 신고와 연동이 필수다. 해외 거래소가 국내에서 합법 자격을 얻으려면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 입출금계정(실명계좌)과 정보보호관리체계인증(ISMS)을 획득해야 한다. 이러한 요건은 FATF 가상자산 권고안에 없는 내용이다. 국내 요건이 국제 기준보다 높은 셈이다.

하지만 국내 실명계좌를 발급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초기 사업자인 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을 제외한, 비교적 후발주자에 속하는 고팍스가 실명계좌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만 무려 4년이다. 해외 거래소가 본사 시스템과 거리가 있는 ISMS 인증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이슈를 해결 못한 해외 사업자들은 모두 불법 사업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정지열 한국자금세탁방지전문가협회 협회장은 "FATF 입장에서 국내 가상자산 요건은 꽤 까다로워 보일 수 있다. 해외 사업자는 국제 기준보다 높은 수준의 요건을 요구하는 국내 시장에 진출하기 꺼려할 가능성이 크다"며 "트래블룰을 효과적으로 시장에 안착시키려면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수리 요건 규정을 삭제해 FATF 권고안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 정보포털 ‘파인(FINE)’에서 ‘제도권금융회사’를 조회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 정보포털 ‘파인(FINE)’에서 ‘제도권금융회사’를 조회할 수 있다.
해외 가상자산 이전 허용하면서 국내 사업자 역차별 논란

금융위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 해외 사업자의 코인 이전을 허용했다. 해외 사업자는 트래블룰 시행의무가 없지만, 자금세탁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라는게 당국의 설명이다. 대신 코인을 보내는 사람과 지갑 계정인이 동일하고 해외 사업자의 자금세탁위험이 낮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에 업계에서는 "법률이나 시행령을 바꾸지 않고 임시 방편으로 해외 이전을 허용한 것은 오히려 불법 거래 여지를 남긴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는 결국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를 역차별하는 결과를 낳은 꼴이 됐다. 현재 트래블룰은 ‘화이트리스트’와 ‘솔루션 구축’, 투트랙으로 연동된다. 화이트리스트란 가상자산 주소 등록을 마친 주소로 출금을 허용하는 방식이다. 솔루션 연동은 별도로 개발된 가상자산 이전 시스템에 기반, 코인을 보내는 작업이다. 화이트리스트보다 복잡하고 어렵다.

거래소마다 정책이 모두 다르지만 국내 거래소의 위험 평가를 통과한 해외 거래소 대부분은 본인 계정을 확인한 후 화이트리스트 등록 절차를 거치면 코인을 주고 받을 수 있다. 별도의 솔루션 연동없이도 가상자산을 보내는 게 가능하다.

반면 트래블룰 적용 대상인 국내 사업자는 솔루션 개발이 필수다. 국내 이용자들이 코인을 주고 받으려면 오는 25일이 지나야 한다. 아직까지는 업비트 관계사 람다256이 개발한 솔루션 베리파이바스프(Verify VASP, VV)와 빗썸, 코인원, 코빗 등 3사가 공동 개발한 솔루션 코드(CODE) 사이의 시스템 연동이 되지 않아서다. 업비트와 빗썸 시장 점유율만 90%에 육박하기 때문에 사실상 국내 이전은 막혀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사업자 역차별 문제를 포함해 법률 미비로 인한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트래블룰이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 지 미지수"라며 "금융위가 시행을 강제하니 시장은 의견 한 번 내지 못하고 따라야 하는 입장이다. 일단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술 개발에 주력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관련기사
[트래블룰 진단]①시기상조 우려에도 강행…글로벌 기준도 미완
[트래블룰 진단]②시행착오 속출, 모호한 특금법에 땜질 처방 악순환
[트래블룰 진단]③정책부재에 거래소도 우왕좌왕…독자노선 걷는 업비트
[트래블룰 진단]④투자자 불편 가중…윤석열 정부 가상자산 정책과 배치
[트래블룰 진단]⑤탈중앙화·데이터 주권 새 과제로...제도 안착 얼마나

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