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가상자산 업계의 자금추적을 위한 글로벌 수칙인 트래블룰이 시행 한 달을 맞는다. 글로벌 기준이지만 시행국은 한국이 최초다. 글로벌 경제가 신 기술을 중심으로 급격한 변곡점에 선 지금, 트래블룰 적용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이 첫 타석에 올랐어야 할 만큼 시급한 것이었는지, 준비는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달린다. IT조선은 트래블룰 시행 과정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앞으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 지 짚어봤다.

일본 ICT 기업 후지쓰는 2018년 고객이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면 매장에서 물건을 살 수 있도록 가상자산을 지급했다. 소비자의 구매 이력을 블록체인에 기록하면 데이터 센터 운영 비용을 줄이고 데이터 분석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블록체인의 지향점인 탈중앙화와 맞물려 개인의 데이터 주권을 보장한 사례다.

트래블룰 시행은 ‘탈중앙화’와 ‘데이터 주권’이라는 가치에 새로운 과제를 안겼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규제인 트래블룰과 탈중앙화를 모토로 하는 블록체인이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탈중앙화 거래소(DEX, Decentralized Exchange)가 재조명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데이터 활용 가치 관심…데이터 주권 논의 치열할 듯

트래블룰 시행 국가에선 중앙화된 가상자산 거래소를 통해 투자자들의 신원과 가상자산 거래 이력이 수집·관리된다. 이 자체만으로 업계에선 말이 많았다. 블록체인은 중앙화된 권력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기술 철학을 기반으로 한다. 일부 가상자산 투자자들이 트래블룰에 반감을 갖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트래블룰 시행으로 개인 정보가 대거 수집되면 머지 않아 데이터 주권 논의도 치열해질 것으로 내다본다. 데이터 주권이란 국가나 기업이 소비자의 개인 정보를 활용해 얻은 이익을 고객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이다. 최근 추진된 마이데이터와 탈중앙화된 신원확인 시스템(DID)도 데이터 주권을 보장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데이터 주권은 경제 생태계 참여자에게 이익을 돌려준다는 블록체인 철학과 잘 맞아 떨어진다. 토큰 이코노미에 데이터 주권을 접목하면 개인은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가상자산을 받을 수 있다. 기업은 정보를 합법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얻는다.

일본의 후지쓰처럼 국내에서도 기업이나 단체가 아닌 환자가 자신의 건강 데이터를 보유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프로젝트가 주목을 끌었다. 여러 기관에 흩어진 개인 정보를 환자에게 돌려주는 메디블록(MED)이 대표적이다.

트래블룰 시행으로 데이터 주권을 보호하는 레그테크(RegTech) 기업도 등장했다. 개인 지갑에 고객확인제도(KYC)를 연동해 본인 계정임을 확인하고 이를 대체불가능토큰 (NFT)으로 발행, 본인 인증 수단으로 활용하게 한 컴패스 프로토콜(Compass Protocol)이 대표적이다. 특히 개인정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처리해 무단 활용을 차단한 점이 장점이다. 개인 정보를 제공한 투자자들은 컴패스 프로토콜 코인을 지급받을 수 있다.

금융감독원 블록체인 자문위원인 최화인 블록체인 에반젤리스트는 "우선 글로벌 트래블룰 표준안이 만들어진 후 개인 정보를 일일이 수집하지 않아도 신원이 일치하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며 "해킹을 줄일 수 있도록 보안 체계를 갖추고 금융 범죄에 대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데이터 주권에 대한 토큰 이코노미가 활상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AML·KYC 규제 프리 ‘DEX’ 주목…거래소 규제로 관심 급증

전문가들은 트래블룰이 안착하려면 약 2년에서 3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그동안 가상자산 거래가 대중화되고 서비스가 더욱 정교해지면, 데이터 주권을 표방하는 토큰 이코노미가 활성화되고 DEX 이용률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자신의 신원이나 가상자산 거래 이력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투자자들은 DEX로 이동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DEX는 중개자가 없는 가상자산 거래 플랫폼이다. 일정한 조건이 성립하면 자동으로 계약이 이뤄지는 스마트 컨트렉트와 컴퓨터가 실행해야 할 명령어인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중앙화 거래소에 비해 규제준수 의무도 낮다. 자금세탁방지의무(AML)나 KYC를 거칠 필요없이 사용자 이름과 인증 암호만 있으면 거래할 수 있다. 정부가 가상자산 규제를 강화하면 탈중앙화 거래소 가상자산이 급등하는 추세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중국이 가상자산 관련 모든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자 DEX인 유니스왑과 스시스왑에서 사용되는 기반 토큰이 하루동안 각각 22%, 18% 상승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내 가상자산 평가 사이트 쟁글에 따르면 지난해 DEX는 중앙화 거래소 규제 효과로 전년대비 23배 성장했다.


탈중앙화 거래소(DEX) 거래량이 지난 2020년 7월 이후 서서히 늘어나다 지난해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지난 1월 DEX 거래량은 1조5000억달러를 넘어섰다. 거래량 1위는 유니스왑(Uniswap), 2위는 스시(Sushi)다. / 쟁글
탈중앙화 거래소(DEX) 거래량이 지난 2020년 7월 이후 서서히 늘어나다 지난해 급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지난 1월 DEX 거래량은 1조5000억달러를 넘어섰다. 거래량 1위는 유니스왑(Uniswap), 2위는 스시(Sushi)다. / 쟁글
DEX 활성화 전망 속 서비스 개선 등 숙제 많아…트래블룰, 혁신과 규제사이

전문가들은 DEX가 대중화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서비스 난이도가 높고 기술상 오류가 잦다는 이유도 있다. 그만큼 DEX 플랫폼이 원활하지 않고 해킹 위험이 많은 상황이다.

최화인 자문위원은 "규제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DEX에 관심을 보이는 투자자가 많지만, 진입장벽이 높아 실제 이용하는 비율은 높지 않을 것"이라며 "DEX 기술과 서비스가 질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보인다면 투자자들이 DEX로 몰릴 수 있다. 오더북(호가창) 프로그램을 개발해 서비스를 개선한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진단했다.

금융감독원 블록체인 자문위원단 단장인 최공필 디지털금융연구소 소장은 "혁신은 편리를 목적으로 한다. 책임있는 혁신은 보호해야 한다"며 "가상자산 서비스는 어느 정도의 익명성을 보장하면서 혁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호 고려대학교 교수는 "트래블룰을 시행하면서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해외로 나가지만, 해외 투자자들은 국내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며 "트래블룰을 시행하려면 증권형 토큰(STO)이나 가상자산공개(ICO), 대체불가능토큰(NFT)에 대한 활성화 방안도 내놨어야 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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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