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견(鬪犬)에서 유래된 ‘언더독(Underdog)’이라는 단어는 아래에 깔리는 개를 뜻한다. 주로 스포츠에서 객관적으로 전력이 열세인 약팀을 비유할 때 쓴다. 반대로 위에 올라타서 승리한 개는 ‘톱독(Top dog)’ 즉 강팀을 말한다. 삼성전자는 무련 30년째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톱독이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에서는 언더독과 다름없다.

올해 1분기 기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1위는 대만 TSMC(53.6%)다. 2위 삼성전자(16.3%)는 TSMC와 비교해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친다. 애플, 퀄컴, 인텔, 엔비디아 등 대형 고객사들이 앞다퉈 TSMC에 물량을 맡기는 추세가 반영된 것이다. 엄밀히 말해 TSMC를 삼성전자의 경쟁 상대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시장 상황에 지각변동을 전망하는 빅 이슈가 터졌다. 삼성전자는 6월 30일 세계 최초로 3㎚(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으로 반도체를 양산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차세대 트랜지스터 구조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 적용도 삼성전자가 처음이다. 파운드리 업력 35년의 TSMC를 상대로 2005년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한 삼성전자가 18년만에 기술 우위를 확인한 것이다.

3나노 공정에서 언제쯤 대규모 물량을 수주하느냐가 남은 과제다. 큰 고객을 잡아야 기술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고, 확보한 신뢰를 통해 또 다른 주문을 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3나노 양산 시기를 올해초에서 연말로 연기한 TSMC의 빈틈을 노려야 한다.

다행히 파운드리 시장 수요가 공급을 월등히 넘어선다. 대형 고객사 대부분이 1순위 공급사로 TSMC를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TSMC는 아직 이들 물량 모두를 위탁 생산할 능력이 없다. 고객사들이 반강제적으로 공급선 다변화 전략을 취해야 한다. 2위 삼성전자에 충분한 기회가 열려있는 셈이다.

500만 주주보다 간절하게 삼성전자 3나노 공정의 성공적 양산을 바라는 쪽은 퀄컴, 엔비디아 등 고객사다. 이들은 한정된 첨단 공정 생산능력을 놓고 경쟁이 더 심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삼성전자가 안정적 수율(합격품 비율)을 바탕으로 기술력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관계인 애플을 뺀 나머지 고객사의 안정적 파운드리 공급자로 자리 잡을 수 있다.

1983년까지만 해도 메모리 반도체에서 언더독이있던 삼성전자는 당시 일본이 장악했던 D램 시장에 진입한 후 톱독에 오른 경험이 있다. ‘절대 성공할 수 없다’던 일본 반도체 업계의 자만심을 일거에 꺾었던 삼성전자는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1년 후 세계 메모리 시장 1위로 우뚝 섰다.

삼성전자는 최근 모두가 우려하고 안 된다고 생각하는 파운드리 세계 정상을 꿈꾼다. 2017년 파운드리 사업부를 별도로 출범시키며 본격적으로 고객 확보에 나섰고, 2018년에 시장 2위에 올랐다. 파운드리 사업이 세계 1위로 성장할 경우 삼성전자보다 더 큰 기업이 출범하게 된다. 경제적 효과가 어마어마해진다는 말이다.

언더독에서 파생한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라는 용어도 있다. 강팀과 맞붙은 약한 팀에 자신을 투영해 응원하는 심리다. 언더독 효과를 느끼는 이유는 ‘비록 열세에 있지만 뭔가 해보려는 열정에 대한 공감’ 때문이다. GAA 기반 3나노 공정 양산은 삼성전자가 열정으로 이뤄낸 산물이다. ‘파운드리 국가대표’ 삼성전자는 언더독이지만 각본 있는 드라마를 쓰는 중이다. 언더독의 반란이 기대된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