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현상의 모든 시스템은 정돈된 질서의 상태에서 무질서로 변화한다. 이를 열역학 제2법칙이라 부르며, 무질서화되는 것을 ‘엔트로피가 증가했다’고 표현한다. 가장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엔트로피 증가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늘어지고 무너져 내리는 얼굴선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노화다. 수십년 동안 하나의 존재에 깃들었던 생체 에너지가 깨어져 내리는 물리적 과정이다. 물리학에서는 무질서의 증가로 설명했던 노화를,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조로 이동하는 것"이라며 조금 더 직설적으로 정의했다.

과학자와 철학자가 뭐라 했건, 충만했던 생체 에너지와 열정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나이가 되면 만성피로로부터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영양제와 피로회복제를 한주먹씩 털어 먹어야 한다. 그러다 일상의 누추함에 울적해 하고, 남아있는 인생의 낙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며, 답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된다.

‘아, 가을이구나! 그렇지. 이 계절엔 이런 씁쓸한 감정을 느껴야 제 맛이지.’ 고단하게 살다가 사라진 이들과 고단하게 살면서 사라질 이들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새삼스레 자각하는 계절이다. 바싹 마른 낙엽을 손아귀에 넣고 바스러뜨리는 것처럼 내 삶도 이렇게 바짝 말라 바스러지는구나. 길바닥 위를 뒹구는 낙엽처럼 눈물이 또르르 흐를 것 같다.

철학자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김영민 교수는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에서 "산다는 건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삶 자체가 고단함의 다른 이름이며, 일생은 하루하루 고단함을 계속 점찍어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존재 외의 다른 거창한 목적이 있을 리 없다. 그저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수시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외부해킹에 노출되며 디도스 공격으로 모든 시스템 리소스가 소진되듯,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끝나갈 때마다 우리는 오류를 겪는다. 바로 존재의 목적을 찾고 싶은 오류다.

사람에 따라 이 오류는 빈도 높게 발생하기도 한다. 답없는 결과값을 찾으려 무의미한 트래픽을 발생, 네트워크와 시스템 자원을 모두 소진하는 경우, 컴퓨터 보안 전문가는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해답 없는 존재의 목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의사들은 우울증이라 진단한다. 그리고 우울증 치료제로 바이러스를 퇴치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답이 없는 것을 알면서 찾고 싶고, 가보지 못한 시공을 상상하며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려 한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완전하고 취약하며 너무나도 빈번히 해킹되는 허술한 프로그램이다. 윈도우95가 크롬을 걱정하는 것처럼 인간은 구형이 신형의 기능성과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하는, 비논리적이고 비정합적이며 불완전한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인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개개의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집단적 취약성을 의미한다. 종종 악질 프로그램은 인간의 이런 취약점을 공격하는 것을 존재 목적으로 삼는다. 기술 용어로는‘익스플로잇(exploit)’이라 부르는 이런 공격을, 인간 용어로 사기라 정의하며, 이런 악질 프로그램을 사기꾼이라 부른다.

세상은 넓고 악질 프로그램도 많다. 대개의 평범한 정상 프로그램은 자신의 취약점을 방어할 보안 시스템없이 작동하다가, 운 나쁘게 악질 프로그램과 바이러스에 감염돼 한없이 느려지거나 시스템 다운을 겪는다. 복구할 수 없을 망큼 망가져버리기도 한다. 외부 침입이 없을 때조차 결함으로 인해 스스로 리소스를 소진시키기도 한다.

잘못된 입력값과 빠진 코딩항을 끝내 채우지 못한 상태로 ‘나’라는 프로그램이 출시되면서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많은 순간들이 쉼 없이 반복된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살고 있나?’를 생각하며, 당초 ‘나’를 프로그래밍 했을 것 같은 이들의 명단(부모님, 조상님, 하느님 등등)을 되짚으며 원망해봤자 마음만 고단할 뿐,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시간 동안 희망과 허망 사이를 끝없이 헤맨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자체 복구 기능이 추가돼 있다. 정상적인 결과값을 출력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후회와 반성을 통해 태생적 오류를 조금씩 개선할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은 물리학 법칙을 거스르며 진화돼 왔다.

존재의 디도스 공격 시기가 도래했다. 이런 때엔 다른 생각말자. 고단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생각을 멈추자. 해야 할 일을 생각 없이 적어보고 기계적으로 우선순위를 매긴 뒤 그에 맞춰 하나씩 해치우자. ‘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존재론적 질문은 바이러스다. 그러니 적어도 이 계절엔 답 없는 질문에 매몰되지 말자. 우리 삶에 다른 선택은 없다. 저절로 멈추는 순간까지 작동해야 한다.

자신의 일상을 자신의 통제 영역 안에 위치시켰다는 소소한 만족감이 주는 심리적 위안은 생각보다 크다. 아침에 눈을 뜬 뒤 침구를 정리하고 자신의 생활공간과 업무공간을 정갈하게 관리하고, 잘 씻고 잘 치우는 이 소소한 일상의 루틴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나는 왜 사는가?’라는 디도스 공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유일한 방안이자, 일상을 지키는 최선의 보안 솔루션이다. 그러니 당신의 삶도 보안패치를 하길 바란다.

*본고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 IT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화인 블록체인 에반젤리스트 jane0725@nate.com
현(現) 금융감독원 블록체인발전포럼 자문위원, 부산시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운영위원, 전(前)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산업경제혁신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