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 입증 책임을 제조사가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에서도 관련 제도 정비에 나서고 있다. 반면, 완성차업계는 관련 입법이 현실화된다고 해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급발진 관련 입증 책임, 제조사가 져야…유력 정치인들도 한목소리

8일 정치권에 따르면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해 국회에서 제도 정비에 나섰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는 할머니가 운전하는 SUV 차량에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가 발생해 동승했던 12살 손자가 사망한 사고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 강릉소방서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 강릉소방서
유가족은 지난달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결함 원인 입증책임 전환 청원'을 올렸고 5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국민의힘 소속 정우택 국회부의장은 자동차 급발진 의심사고시 결함 원인에 대한 입증책임을 제조사가 부담토록 하는 내용을 담은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2017년에 개정된 현행법에 따르면 소비자가 제조물로 인한 피해를 입었을 때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제조사의 책임이 인정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 부의장에 따르면 2017년 개정 이후 국내 ‘자동차 급발진 사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제조사가 책임을 진 건은 한 차례도 없었으며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력이 투영된 제조물의 경우 소비자가 제조사의 책임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지속돼 왔다.

이에 개정안은 손해배상 입증책임의 주체를 전환해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자가 고의 또는 중과실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경우에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공평한 입증책임의 분배를 위해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제조물을 취급하는 제조업자를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조항도 담고 있다.

유력정치인들도 급발진 사고 관련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강원도 강릉을 지역구로 둔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7일 자신의 SNS를 통해 "다수의 전문가는 사고 원인을 급발진으로 지목하고 있다.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 청원은 5만명을 넘었다"며 "비극의 실체를 규명하고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법 개정을 비롯한 제도적 개선에 힘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급발진 사고 피해 입증 책임이 전적으로 소비자에게 있다. 제도적인 미비가 원인이다"며 "청원 내용을 토대로 피해자가 입증하는 책임을 완화하는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車 업계 "EDR 이상 대안 있나, 혼란 야기할 수도"…전문가 "소프트웨어 관련 규명 지원 필요"

완성차업계는 사고기록장치(이하 EDR) 이상의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 입증 책임을 제조사에 지우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EDR은 차량에 내장된 데이터 기록용 블랙박스를 일컫는다.

사고 전 주행속도, 엔진 회전수, 가속페달 변위 등의 데이터가 기록되는 장치로 급발진 의심 사고 시 증거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제조사에게 입증 책임을 지운다는 취지의 입법은 제조사가 소비자에 비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기술적으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 것 같다"며 "사고가 나면 EDR에 30여가지 항목이 기록이 된다. 해당 기록은 클라우드로 들어가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조사도 그것으로 급발진이 아니라고 입증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 SNS.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 SNS.
이어 "EDR외에 논란을 해소할 수 있는 기술, 장치가 나오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반복될 것이다"며 "오히려 제조사 입장에서는 급발진으로 오해한 사고에 대해서도 행정력 등 노력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한 EDR 기록에서 급발진으로 볼 수 있는 사안이 나오지 않았다"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조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으나 현실적으로는 EDR에 의존해 급발진 여부를 확인할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해당 입법이 현실화되면 운전자의 단순 실수 등 과실 인정을 회피하는데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소모적인 논쟁이 발생해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부 전문가들도 제조사에 입증 책임을 지우는 입법은 형식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내비쳤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오래된 급발진 의심 사고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며 "이제는 소프트웨어적인 문제로 들어가기 때문에 급발진 의심 사고를 규명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규명 책임을 제조사에 지운다고 해서 규명이 되는 것은 아니며 책임 소재가 바뀌지도 않는다. 법만 만들어 놓고 똑같으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며 "소프트웨어 규명 관련 프로세스 강화나 프로그램 업그레이드 같은 지원책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고 전했다.

조성우 기자 good_sw@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