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상용화될 가능성이 적은 디지털 신기술에 대한 규제는 나중에, 빠른 시일 내 쓸 일이 있을만한 규제는 바로 제정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에 정보 독점권이 가지 않도록 차단할 수 있는 논리를 마련하고, 미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갈 MZ세대의 의견을 많이 들어야 한다. 속도보다 정확성과 실효성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해 사회·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디지털 시대의 이슈를 발굴하고 해법을 논의하는 ‘디지털 소사이어티’ 구성원과 정부 관계자들이 나눈 디지털 신질서 관련 토론 내용이다.

박윤규 과기정통부 2차관이 18일 디지털 국정과제 현장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박윤규 과기정통부 2차관이 18일 디지털 국정과제 현장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는 18일 디지털 소사이어티 전문가들과 ‘디지털 국정과제 현장간담회’열고 디지털 권리장전에 포함돼야 할 가치와 원칙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원우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최세정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 ▲이은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최재붕 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 ▲김재인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등 다양한 분야 학계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박윤규 과기정통부 2차관은 기존에는 디지털 국정과제 현장간담회를 기업에 방문해 진행했으나, 시즌2에서는 직능 단체·협회를 직접 찾아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앞서 나열한 전문가들은 2022년 10월 창립된 ‘디지털 소사이어티’ 구성원이다.

기술 때문에 사람이 다치면, 사과도 AI가?…윤리적 문제도 논의 대상

테슬라 자율주행차가 사람을 치었을 때 책임은 테슬라에 있을까 운전자에 있을까. 테슬라 책임이라고 한다면 안에 타있던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자신의 차에 치인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될까.

인공지능(AI)을 비롯해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산업뿐 아니라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종류의 쟁점이 발생한다. 과거에 없던 이 같은 쟁점을 다루기 위해서는 기준부터 세워야 한다. 법적 책임 외에도 윤리적 문제까지 논의할 부분이 다양하다.

2016년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만들어 낸 가짜 이미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AI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것에 모두 놀랐지만 이제는 자율주행차, AI수술로봇 등 생명에도 영향을 주는 시대가 됐다.

빠른 시일 내 AI 시대 헌법과 같은 디지털 권리장전을 완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박윤규 과기정통부 2차관은 "사회 전반에서 디지털 전환이 확산하면서 AI 기술 발전과 진흥을 높일 수 있는 수용성과 규범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다"며 "디지털 권리장전은 헌법과 같은 역할로, 디지털 전환에 따른 규범체계가 각 분야에 일관되게 스며들도록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정부 계획에 학계 전문가들은 급하게 말고 정확히 할 것을 주문했다. 권리장전이 정부의 정책 중 하나로만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실효성 있는 대안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18일 제1차 디지털 국정과제 현장간담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인애 기자
18일 제1차 디지털 국정과제 현장간담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인애 기자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무조건 빨리 나오는 것이 답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조금 더 집중해서 역량을 투입해 권리장전이 그냥 정부의 주요 정책과제로만 떠도는 게 아니라 실제로 회자되고 사람들이 이용할 만하게 나왔으면 한다"며 "우리가 빠른 액션을 통해서 신질서하고 권리장전을 마련함으로써 우리가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데서 ‘선도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 권리장전과 신질서를 만드는 목적이 뭘 담고싶은건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래 디지털 시대 이끌 MZ세대 의견 중요해…박 차관 "MZ 주재 간담회도 고려"

디지털 신질서에 대해 진짜 디지털의 수혜를 받으며 자라온 MZ세대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반대로 디지털 플랫폼으로 힘이 이동함에 따라 일방적 통제가 생겨나는 것에 대비해 정보의 통제권을 누가 가질 수 있는 지에 대한 논의 자체를 연륜 있는 전문가들이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재붕 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대한민국 사회의 기준은 입법부가 만드니까 평균 61세가 정하는데, 이들은 디지털에 익숙하지도 않고 잘 모르는 세대다"며 "그 세대 사람들은 디지털이 두렵지 혜택을 본 사람이 없다. 미래를 끌고 갈 MZ 세대의 관점을 반영한 정책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박윤규 차관도 "(연속 현장간담회와는)별도 트랙으로 MZ세대가 주재하는 간담회를 만드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반면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저는 이 권리장전을 우리가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권리장전이라는 건 힘이 존재하고 그 힘이 누군가를 눌렀을 때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보의 통제권을 다 플랫폼이 가져가 힘의 이동이 생겼을 때 논리적으로 차단할 수 있도록 논의하기 위해서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가까운 시일 내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기술 관련 질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예컨대 자율주행차의 경우 고속도로 외 모든 도로에서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한 자동차는 먼 미래에나 나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에 대한 규제를 먼저 논의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박윤규 차관은 "(디지털 권리장전은)개방적이고 긴 호흡을 가지고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연구도 선행돼야 해 과기정통부가 긴 시각으로 보면서 같이 만들어가겠다"며 "(디지털 시대를)선도하겠다는 것보다는 모범적으로 하자는 얘기를 많이 하고 있다. 속도가 늦더라도 조금 더 본이될 수 있는 부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사회 전반적인 윤리장전은 아직 구상하지 못했지만 AI윤리원칙, 메타버스윤리원칙처럼 앞으로 발전하는 디지털 사회를 위한 윤리원칙 만들고 각 분야에 적용될 수 있도록 강한 노력을 하고 있다"며 "새로운 디지털 질서를 만드는 시발점으로서 권리장전을 얘기하고 있고, 권리장전은 디지털 사회의 각 주체들 간의 관계의 설정 작업을 하는 것이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이인애 기자 22na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