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법안 자체가 폐기될 위기에 놓인 가운데 간호단체가 본격적인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간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당초 17일 의료연대는 대규모 파업을 예고했으나 이를 철회한 반면, 간호법 거부에 대해 간호계가 병원 업무에 차질을 줄만한 준법투쟁에 나서는 등 직역 간 ‘공수’가 바뀐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한간호협회가 대리처방과 수술 등 불법 의료행위를 거부하고 간호사 면허증 반납 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 뉴스1
대한간호협회가 대리처방과 수술 등 불법 의료행위를 거부하고 간호사 면허증 반납 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 뉴스1
범의료계에 따르면 대한간호협회(간협)가 윤 대통령의 간호법 거부권 행사에 저항하며, 사실상 불법진료행위에 해당하는 대리처방·수술·기록·채혈·초음파·심전도 등 총괄업무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19일엔 광화문에서 대규모 규탄대회를 열고 조직적인 연차 투쟁을 펼칠 예정이다.

김영경 간협 회장은 "임상병리사 등 다른 보건의료 직능의 면허업무에 대한 의사 지시를 거부하겠다"며 "간호사가 거부해야 할 의사의 불법적인 업무에 관한 리스트를 의료기관에 배포했다"고 알렸다.

이를 위해 협회 내 불법진료신고센터를 설치해 위법을 저지른 병원과 의사를 고발할 방침이다. 특히 이러한 진료를 전담한 PA(진료지원간호사)가 일련의 업무를 거부하면서 병원 진료에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PA간호사의 경우 공식 직무는 아니지만 의사가 부족한 응급실 및 필수의료 현장에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는 존재다. PA 업무는 엄밀히 간호사 업무를 넘는 행위로 불법이지만, 의료기관의 진료비 부담 등을 덜어주고 의료 공백을 채우는 핵심인력이기 때문에 정부가 묵인 중인 영역이기도 하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 따르면 전국 1만명 정도가 PA간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립대병원만 해도 전국 PA 인력이 2021년 기준 1091명에 달한다. 이렇듯 PA간호사는 정상적인 의료 행위를 수행하게 보조하는 중추 역할로, PA간호사가 준법투쟁에 나설 경우 상당한 진료 차질이 예상된다.

또한 간호사 면허증 반납운동을 전개한다. 김 회장은 "앞으로 한 달간 전국 간호사 면허증을 모아 보건복지부에 반납하겠다"며 "면허를 반납하는 날 간호사는 광화문에 집결해 허위사실로 부당하게 공권력을 행사한 복지부 장·차관을 고발하고 파면을 요구하겠다"고 강조했다.

간협은 간호법을 거부한 것은 국가가 간호 업무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며, 면허 반납으로 대정부 규탄을 펼치겠다는 전략이다.

대한간호협회 간호사들이 12일 오후 서울 동화면세점 앞 세종대로에서 국제간호사의 날 기념 집회를 갖고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 뉴스1
대한간호협회 간호사들이 12일 오후 서울 동화면세점 앞 세종대로에서 국제간호사의 날 기념 집회를 갖고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 뉴스1
19일에 개최되는 규탄대회는 ‘간호법 거부권 규탄 및 부패정치 척결’을 외칠 전망이다. 이날 대회에 참석하는 간호사는 조직적인 연차 신청을 통해 병원 진료 활동을 거부하는 식으로 투쟁에 동참한다.

김 회장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았던 후안무치한 탐관오리들 즉, 입법독주라는 가짜 프레임을 만들어 낸 자, 간호법을 대표발의하고 비겁하게 국정활동을 포기한 자들이 다시는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없도록 심판하겠다"며 "62만명 간호인은 앞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간호법에 관한 허위사실과 가짜뉴스에 대응해 투쟁하겠다"고 호소했다.

반대로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재의요구권이 행사되지 않은 ‘의료인 면허취소법’에 대한 행동을 취할 예정이다. 의료인 면허취소법은 간호법과 함께 묶여 제대로 협의를 진행하지 못했다는 것이 의협의 주장이다.

의료인 면허취소법은 의료 관련 범죄, 성범죄, 강력 범죄 등으로 인한 금고 이상 형을 선고받은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다는 개정안이 골자다.

비대위 관계자는 "의료인 면허취소법은 대통령 재의요구권의 대상이 충분히 될 수 있는 악법이지만, 이점이 당정 협의 과정에서 누락된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국무회의 전후로 정부와 여당이 밝혔던 계획대로 의료인 면허취소법의 위헌 소지를 없애고, 국민 정서에 부합한 수준으로 재개정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간호법이 완전 폐기될 때까지 13개 의료연합의 활동을 지속할 전망이다. 재의요구된 법안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의결이 되기 때문에 국회 내 상황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비대위 관계자는 "비대위는 보건복지의료연대와 함께 법안 폐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국회를 지켜볼 것이다"며 "그럴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만약 간호법이 다시 한 번 국회에서 의결이 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본 비대위와 보건복지의료연대는 일시 유보했던 연대 총파업에 곧바로 돌입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일련의 집단행동 과정에서 투쟁 참석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의료인들에게 참여가 강요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부산대병원에서 근무 중인 모 간호사는 "병원 측이 전화를 돌려 그 일정에 쉬는 모든 간호사에게 집회 참석을 강요하고 있다"며 "참석 여부도 묻지 않은 채 모두가 참가하라며 압박하고 있어 마음이 좋지 않다"고 호소했다.

서울대학병원 소속 간호사 역시 "간호법이 거부된 것에 대해 굉장히 우려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가족 일정으로 연차를 냈을 뿐인데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라는 말을 들었다"며 "무조건적인 참여를 강요하는 듯해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태다"라고 말했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