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청구 전산화 시작됐지만… 참여병원 전체 17% 그쳐 반쪽 출범

전국 병원 4235개 중 참여 확정 병원 733곳 "일반병원, 의료기관 소송 제기 우려해 참여 저조"

2024-10-27     전대현 기자

소비자가 병원에 직접 가서 서류를 발급받을 필요 없이 모바일 앱에서 바로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가 시행됐다. 다만 정부와 보험업계의 참여 독려에도 대상 병원 참여율이 저조하다. 반쪽짜리 출범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의료계 참여를 독려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5일 김병환 금융위원장을 비롯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보험사 CEO, 보험개발원장 등이 '실손보험 청구 전산시스템 오픈식'에 참석했다 / 전대현 기자

27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25일부터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를 순차적으로 시작한다고 밝혔다.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는 소비자가 요청하면 요양기관(병·의원 및 약국)이 보험금 청구 서류를 보험회사에 전산으로 전송함으로써 보험금 청구를 위해 의료기관을 방문해야 하는 불편함을 없앤 서비스다. 보험개발원 ‘실손24’ 앱, 웹사이트를 통해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

실손보험은 지난해 기준 약 3997만명 가입자와 연간 1억건 이상의 보험금 청구가 이뤄져 제2의 국민건강보험이라고도 불린다. 가입자 수가 많은 만큼 실손청구 전산화가 확대될수록 소비자 편익이 증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상급병원을 제외한 의료기관 참여율이 저조해 소비자 편익이 당장 크게 늘어나기 어렵다는 점이다. 금융위가 보험개발원에서 보건복지부, 금융감독원, 보험업계와 함께 전산시스템 운영 상황과 요양기관 참여 현황 등을 점검한 결과 지난 24일 기준 보건소를 제외한 전국 4235개 병원 중 참여를 확정한 곳은 733곳이다. 전체 대상 중 17.3%만이 참여하기로 했다. 

당장 청구 전산화를 이용할 수 있는 요양기관은 210곳이다. 나머지 기관의 경우 시스템 연계가 마무리되는 대로 순차적으로 청구 전산화가 시행될 예정이다.

병원별로 살펴보면 ▲상급종합병원 47곳(참여율 100%) ▲종합병원 214곳(64.7%) ▲일반병원 342곳(24.4%) ▲요양병원 59곳(4.2%) ▲한방병원 51곳(9.1%) 등으로 나타났다. 전체 실손보험 청구 비중에서 일반 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32.7%에 달하지만, 대다수 중소 병원이 여전히 참여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종합병원 이하 병원들의 참여율이 저조한 이유는 실손청구 전산화 작업에 드는 비용을 두고 당사자간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병원은 자체 전산시스템 구축이 어려워 전자의무기록(EMR)업체가 개발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니어서 참여 유인이 적다. 최근 보험사들이 EMR업체에 조금 더 비용을 지불하기로 합의한 이후 속도가 늘고 있지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기엔 무리가 있다는 시각이다. 

특히 일반병원의 경우 상급종합병원보다 실손청구 전산화에 대한 민감도가 크다. 필요 이상의 의료 정보를 보험사에 넘기면 비급여항목에 대한 보험금 청구가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통상 일반병원은 상급병원에 비해 도수치료, 체외충격파, 증식치료 등 비급여항목이 차지하는 의료비중이 높다. 향후 보험사들이 획득한 진료 정보를 통해 의료기관에 소송도 제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상급종합병원 관계자는 “상급종합병원은 기본적으로 진료비가 높다보니 실손보험을 청구하는 비중이 높아 창구 업무 간소화 차원에서 키오스크 사용을 적극 유도해왔다. 기존에 하던 시스템이 정부 시스템으로 가는 것 외에 큰 변화는 없다”며 “일반병원의 경우 중증치료나 의학적 비급여 항목보다는 도수치료, 체내충격파 등 비급여 부분이 많다보니 전산화 작업에 미온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정부가 병원에 진료 수가 등 관련 인센티브 방안이나 강제성을 부여해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의료계 참여 협조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실상 법안 취지가 무색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험사나 금융당국이 소비자 편익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의료계가 참여하지 않으면 의미는 퇴색된다”며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 정보가 노출되다보니 적극적이지 않은 건 이해가 되지만, 환자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요즘 시대에 보험금 청구를 위해 종이서류를 떼거나 팩스로 보내면서 소비자 편익을 떨어뜨리는 일은 말이 안된다”며 “소비자 편익을 제고하기 위해 정부가 의료계 참여를 유인할 수 있는 방안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대현 기자 jdh@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