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러 나비효과… 환손실 우려 시중은행, 대출 조이나 [트럼프시대 금융은 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 직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관련 시장정책이 쏟아지는 가운데, 국내 금융권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여기에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까지 겹치면서 가뜩이나 탄력을 받았던 달러 강세는 그 속도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이행에 초점을 맞췄던 시중은행들은 이제 새로운 리스크 관리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사업계획을 다시 짜는 한편, 위험가중자산(RWA) 증가를 대비해 대출을 보수적으로 내줄 수밖에 없을 거란 진단도 나온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외환시장 마지막 거래일이었던 12월 30일 정규장 종가 기준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472.5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는 IMF로 구제금융을 받았던 지난 1997년 종가 1695원 이후 종가 기준으로는 27년 만에 최고치다. 전년도 마지막 거래일이었던 2023년 12월 28일과 비교하면 184.5원이나 올랐다.
지난해 11월 12일 트럼프 후보자의 당선으로 1400원대에 접어든 후 좀처럼 환율이 하락세에 접어들지 못 하는 모양새다. 이는 12월 들어 환율 상승과 기준금리 하락 등 불안정한 대내외 여건이 국내 금융사 경영에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강달러 현상의 지속으로 이미 주요 시중은행의 외환 손실은 커지는 중이다.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은 이미 상반기에만 4000억원 가량 순손실을 기록한 바 있다. 하반기 환손실은 이보다 클 거란 전망이다.
한국은행도 금융안정 보고서를 통해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인한 급격한 환율 상승이 금융기관의 손실 흡수력 및 유동성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환율 급등으로 은행의 총자본 비율과 유동성 비율이 하락하면 (은행의) 시중자금 공급 기능이 제약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수출기업들도 미국 정책 변화에 무방비한 상태다. 강달러 현상이 장기화할 경우 원자재 구입 비용과 물류비가 증가하기 때문에 이들 산업은 특히 환율 민감도가 높다. 이들과 거래하는 시중은행은 더욱 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직후 각종 경제 정책을 발표할 전망이지만, 한국은 정상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한 상태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난달 27일 2주 만에 탄핵되며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해당 자리를 이어받는 등 혼란이 이어져 신인도마저 끝없이 하락하는 상황이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취임 직전 달러-원 환율의 시작점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따라 2025년 환율 경로가 달라질 것”이라며 “환율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내년에 1500원대 환율도 열어둘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정치적 리스크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정부 정책 지속성에 대한 불확실성 증가가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 최대 수혜 업종인 은행의 주가에 반영되고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주요 금융사들이 주주환원 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지만, KRX 은행 지수는 비상계엄 선포(지난달 3일) 후 지난달 30일까지 약 14% 하락했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강달러 기조를 고려해 기업금융 스탠스를 보수적으로 마련하는 등 금융권이 제반 여건을 다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특히 강달러 현상은 위험가중자산(RWA) 증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은행권이 내년 대출을 더 보수적으로 내줄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은행은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이미 계획한 수준의 배당을 고려해서 이익을 유보해야 한다”며 “보통주 자본(CET1) 비율 하락폭을 관리하기 위해 RWA 가중치가 높은 중소기업 대출 태도가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재만 하나증권 연구원도 “원·달러 환율이 1430~1440원선에서 고착화되면서 은행 자본비율과 손익에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라며 “RWA 관리 방안 등으로 CET1 비율이 13%를 소폭 상회하고 있는 하나금융과 신한지주는 연말 비율을 어떻게든 13%로 유지하려고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가계대출 조정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일 신년사를 통해 “미 대선 이후 신정부 정책 방향에 대한 우려로 달러화 강세가 지속되면서 환율 변동성이 확대됐고, 12월에는 비상계엄 사태로 정치적 불안이 더해지며 환율이 다시 큰 폭으로 상승했다”며 “경기를 고려해 비부동산 가계부채 및 비수도권 부동산 대출에 대한 미시적 조정을 검토할 수는 있겠지만, 가계부채 증가율을 명목 GDP 성장률 내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거시건전성 정책 기조는 흔들림 없이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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