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IT] 자율상장, 거래소 권한인가 책임인가
거래소 자율규제 4년, 투자자 피해만 수두룩
한때 홍콩은 ‘가상자산의 천국’으로 불리며 바이낸스, OKX 등 글로벌 거래소들의 아시아 거점 역할을 했다. 정부는 핀테크 산업을 키우겠다는 이유로 반시장 규제를 만들지 않았고, 그 틈을 타 자국 규제를 피하고자 했던 수많은 가상자산 기업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홍콩에 진출한 글로벌 거래소 FTX는 대형 사고를 쳤고, 홍콩 가상자산 산업 전반에 대한 신뢰 붕괴를 불러왔다.
뒤늦게 가상자산 거래소의 진입 규제와 상장 관련 제도를 손보았지만, 이미 투자자들은 빠져나간 후였다.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방치했던 상장 시스템이 결국 시장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다.
국내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여전히 상장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대형 거래소가 특정 코인을 상장하면, 국내 거래소들은 서둘러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산을 상장하며 속도전으로 고객 유치에 나서는 모습이다.
그 결과는 대체로 실망스럽다.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상장빔(상장초기 급등현상)’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고, 시장에 풀린 유통량이 적은 상태에서 가격만 과도하게 출렁이는 현상이 반복된다. 결국 거래소 시스템은 몰려든 사용자로 인해 과부하를 일으키고, 주문 오류나 거래 지연 같은 기술적 문제까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간 금융당국은 지금까지 상장 문제에 관해 개입을 자제해왔다. 불공정 거래나 범죄가 아닌 이상, 상장은 거래소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내 거래소 간 협의체인 DAXA(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 역시 “상장은 거래소의 고유 마케팅 권한”이라며 개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자율규제라는 이름 아래 누적된 투자자 피해는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2023년 위믹스 상장폐지 사태부터 올해 코인원의 '닐리온' 전산장애 사건까지, 무분별한 상장과 상장폐지로 인한 문제는 날이 갈 수록 더욱 많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금융당국과 정치권도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제정될 ‘2단계 이용자 보호법’에 상장 심사 기준을 포함하겠다고 예고했고, 국회에서도 거래소의 상장을 금융당국이 직접 감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역시 이달 “제도 미비로 가상자산 자율규제를 도입했지만, 가상자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급등락하는 현상이나 전산 장애가 반복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가상자산 거래소의 상장 절차를 개선하고 금융회사 수준의 안전성을 확보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상장 규제가 제도권에 들어온다고 정말 시장이 정돈될 것이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홍콩은 뒤늦은 규제 도입으로 시장의 신뢰를 되찾지 못한 채 투자자 이탈과 유동성 위축이라는 부작용을 겪었고, 미국은 증권성 판단 기준의 불확실성 속에서 산업 전반의 위축과 소송 리스크만 키워가고 있다.
이미 상장을 마케팅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거래소 입장에서 새로운 규제는 오히려 먹거리를 제약하는 요인으로만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하는 규제는 오히려 혼란을 키울 우려도 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가늠하기 힘든 때늦은 규제보다는, 거래소들이 먼저 ‘자율’이라는 단어에 동반하지 못했던 책임을 뒤늦게라도 성찰해야 한다. 이름뿐이 아닌 실질적으로 작동고, 자율이 진짜 자율로 기능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원재연 기자
wonjaeye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