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IT] 탕감 대신 빚 갚는 구조 만들어야
이재명 정부가 장기 연체자와 저소득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대규모 채무 탕감에 나선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에 채무조정기구(배드뱅크)를 설치하고,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의 개인 무담보채권을 일괄 매입하는 방식이다. 16조원 규모로 소상공인 113만명이 수혜를 볼 전망이다.
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오는 9월에 돌아오는 코로나19 피해 중소기업·소상공인 금융권 대출 만기 규모만 47조원이다. 여기에 지난 3년간 고물가와 경기 침체 등이 지속되면서 이들의 사정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했다.
최악의 부실을 막고 재기의 기회를 준다는 정부의 취지에 이의를 달 이는 없다. 우리 경제의 중추인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살아야 내수 회복의 불씨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퍼질 ‘도덕적 해이’라는 부작용에 대한 무감각은 우려스럽다. 해당 정책이 발표되자 ‘성실하게 갚은 사람만 바보’라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채무에 대한 자기책임 원칙은 희미해지고 힘겹게 빚을 갚아온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한다. 결국 사회 전반에 ‘빚을 갚으면 손해’라는 잘못된 인식을 정부가 직접 심고 있는 셈이다.
논란은 정부가 바뀔때마다 반복된다. 지난 정부에서도 청년 빚을 탕감해준다며 금융권만 옥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반복적으로 빚을 갚아주니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부실이 기다리고 있을터다.
문제가 뭘까. 구조개혁이 뒷전으로 밀린 부채탕감이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가 없어서다. 빚을 면해주는 구제정책은 구조개혁보다 상대적으로 쉬울 수밖에 없다. 취약계층 구제정책은 사회적인 대의와 안전망 강화라는 명분으로 포장되고 여기에 정부 재정과 금융권이 그동안 폭리를 취해 온 이자이익이 동원된다. 논리도 간명하고 이행도 어렵지 않다.
반면 썩은 곳을 도려내야 하는 구조조정 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 만큼 넘어야할 갈등이 많다.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훨씬 많이 투입된다는 뜻이다. 구조개혁 필요성이 커지는데도 땜질식 처방이 내려지는 이유다.
정책은 선한 의도를 넘어 실효성과 지속 가능성을 따져야 한다. 단기 유예나 탕감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구제’만 있고 ‘구조’가 빠진 정책은 결국 빚을 반복하게 만든다. 회생 가능한 이들을 선별하고, 신용 회복의 사다리를 복원하는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정부는 누구나 취약차주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빚은 언젠가 누가 대신 갚아준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탕감이 원칙이 되면 신용질서는 무너진다.
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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