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주도 CBDC 실험 멈칫… 스테이블코인 갈아타는 은행들

2차 실험 보류에 은행 이탈 조짐…정치권은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압박

2025-06-30     원재연 기자

한국은행이 추진해온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험이 난관에 부딪쳤다. 새 정부 들어 민간 주도의 디지털 화폐인 스테이블코인에 힘이 실리면서 프로젝트 2차 테스트가 중단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1차 실험에서 수백억원의 비용을 선투입한 시중은행들은 후속 참여에 난색을 보이고, 정치권은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대한 한은의 명확한 입장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 CBDC 실험의 지속 여부마저 불투명해졌다.

한국은행 CBDC 테스트 프로젝트 한강

30일 은행 및 디지털자산 업계에 따르면 한은은 지난 26일 CBDC 관련 ‘프로젝트 한강’ 1차 실거래 테스트에 참여한 7개 은행에 2차 테스트 논의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1차 실험은 올 4월부터 약 10만명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예금토큰을 발행해 실제 가맹점에서 결제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1차 테스트에 참여한 은행들은 전산 인프라 구축, 클라우드 기반 노드 운영,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 적게는 30억원, 많게는 60억원에 이르는 예산을 투입했다. 평균 50억원을 기준으로 총 350억원 가까이 민간이 부담한 셈이다. 그러나 한은이 상용화 로드맵 없이 테스트만 연장하려 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일부 은행들은 후속 참여를 보류하거나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중·하순 각 은행장들과 개별 면담을 통해 2차 테스트의 절반 이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험 추진 동력을 되살리진 못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단순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사업 수준인데, 내부 예산과 시스템을 다시 열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상용화 계획 없이 테스트만 반복하는 데 회의적인 분위기”라고 말했다.

한은의 CBDC 실험이 제동에 걸린 사이, 정치권은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0일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발의해 자기자본 요건만 충족하면 은행 외 금융사도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국정기획위원회는 최근 한은에 스테이블코인에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달라며 사실상 기존 입장 철회를 요구했다.

은행권은 이미 독자적 대응에 나섰다. 국민·신한·하나·농협은행 등은 스테이블코인 상표권을 다수 출원했으며, 금융결제원을 포함한 협의체를 구성해 공동 발행 모델을 준비하고 있다. 일부 은행은 페이 서비스 기업 및 블록체인 업체와의 합작법인 설립도 검토 중이다.

KB국민은행은 최근 ‘KBKRW’, ‘KRWKB’, ‘KKRWB’ 등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 17건을 특허청에 출원했고, 하나은행도 ‘HanaKRW’, ‘KRWHana’ 등 16건의 상표를 등록했다. 일부 가맹점에서는 예금토큰을 활용한 실물 결제 실험도 진행 중이다. 카카오뱅크 역시 ‘BKRW’, ‘KKBKRW’ 등 12건의 상표를 출원하며 합류했다.

한은은 내부적으로 유럽연합의 ‘미카(MiCA)’나 미국의 ‘지니어스 액트’처럼 중앙은행이 민간 발행 코인에 대해 인가권이나 의견제시권을 갖는 모델을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현재로서는 금융위원회나 기획재정부 등 다른 부처와의 권한 조율도 마무리되지 않아, 실질적인 제도 설계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CBDC와 스테이블코인은 모두 법정통화 가치에 연동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발행 주체가 중앙은행과 민간으로 나뉘는 만큼 정책적 성격은 크게 다르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유통될 경우, 기준금리 조정 등을 통한 통화정책 효과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은은 신중한 입장을 유지해왔다.

은행권 관계자는 “지금은 테스트보다 시장에 실질적으로 적용 가능한 방식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며 “CBDC는 제도화 방향이 여전히 불명확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구체적인 사업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wonjaeye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