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K금융, 일장춘몽이 아니기를
금융위기의 불안감이 고조되던 2008년 여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여파로 휘청이던 미국 4대 투자은행(IB) 리먼 브러더스의 구원투수로 한국의 한 은행이 이름을 올렸다.
파이낸셜타임스(FT),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들은 당시 월가에서는 생소했던 한국의 KDB(한국산업은행)가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결국 딜은 무산됐고 리먼은 파산을 맞았다. 공중해체된 리먼은 일본계 금융기관인 노무라로 넘어갔다.
산은의 리먼 투자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산은이 만신창이가 된 리먼을 인수했더라면 그 후폭풍은 두고두고 우리 경제를 괴롭혔을지 모른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이후 “산은은 리먼을 구하기에는 너무 작은 배였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전세계 투자자들에게 'KDB'라는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각인이 됐기 때문이다. 또 이는 한국 금융이 월가 IB업계에도 진출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엿본 사례로 남았다. 민유성 당시 산은 행장은 기자와 만나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여운을 남기도 했다.
한류가 갈수록 뜨겁다. 조선에 방산, 뷰티, 음식을 넘어 영화, 드라마, 음악, 예능 등 문화상품까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글로벌 OTT 플랫폼인 넷플릭스에서는 ‘오징어 게임’, ‘폭싹 속았수다’에 이어 이제는 애니메이션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까지 전세계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 잡았다.
K콘텐츠 열풍은 K감성의 세계화라는 차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케데헌의 경우, 작품 속 오리지널 수록곡 8곡이 빌보드 차트 100위 안에 오르면서 가상의 K팝 음악이 현실 음원시장까지 석권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그 안의 음악과 스토리, 캐릭터, 그리고 퇴마라는 무속신앙의 세계관까지 더해져 ‘K’의 확장성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확인시켜 줬다.
K만 붙이면 세계화와 선진화와의 상징인가 싶지만 아직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금융이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자는 구호가 20여년전부터 나왔지만, 국내 대표 IB라 할 수 있는 미래에셋증권이나 한국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골드만삭스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내 대표 금융사라 할 수 있는 KB금융의 자산규모는 760조원대로 국내에서는 1위지만, 세계 금융지주사 순위로는 60위권에 그친다. KB금융을 포함해 신한금융, 하나금융 등 금융지주사 모두 적극적인 인수합병과 사업 다각화로 몸집도 불리고 최첨단 금융기법으로 다양한 상품 출시에 나선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자장사가 메인 비즈니스 모델이다.
오죽하면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금융기관들이 손쉬운 주택담보대출 같은 이자놀이, 이자수익에 매달리지 말고 투자 확대에도 신경써 달라”고 했겠는가. 하지만, 국내 대표 금융기관들이 이자장사에 전념하게 된 건 자의라기 보단 타의에 의한 바가 더 크다.
국내 금융산업은 예금과 대출, 투자, 보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포괄적인 규제를 받는다. 금융사의 설립과 영업은 물론, 자산 건전성, 심지어 판매나 광고에도 규제가 따라 붙는다. 그러다 보니 금융당국이 가계부채를 조이라 하면 대출금리가 오르고, 가계부채 확대를 주문하면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금융시장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소비자 보호를 우선해야 하는 명분 때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금융산업에서는 혁신기업이 나올 수 없는 구조가 돼 버린 것도 현실이다. 금융규제 샌드박스로 새로운 서비스나 기술의 개발을 촉진한다지만 금융사와 빅테크간 형평성 논란으로 그 수혜 대상은 일부 핀테크 정도에 그친다.
국내 금융사들이 글로벌 경쟁력이 없는 게 아니다. 4대 은행이 지난해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15조원으로 2020년대비 2배 이상 늘었다. 해외 임직원수도 2500명이 넘고, 해외자산 규모도 225조원이나 된다. 진출국가는 41개국, 점포수는 200여개가 넘는다.
단순히 해외진출만 한다고 해서 K금융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향후 경쟁우위의 키는 인공지능(AI)과 가상자산 등을 활용한 디지털 대전환이 될 거란 전망이다. 이들 디지털 도구들이 K금융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책의 유연성과 과감한 규제혁신이 필수다. 덩치와 규모에서 이미 한 수 아래인 국내 금융사로서는 어찌보면 기회다.
지난해 8월 시작한 상용 AI서비스를 활용한 혁신금융서비스 신청에 4개월만에 141건의 신청이 몰렸다. 이는 국내 금융사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AI 활용에 매진하고 있는지, 규제개혁에 얼마나 목말라하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K금융도 결국 다른 ‘K’의 성공 방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의 강점을 살리면서 자유로운 혁신 아이디어를 규제라는 이름으로 꺾지 않는 것. 치열한 경쟁을 자연스러운 문화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결과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 따른 성과물을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필수다.
금융규제 기구의 개편논의가 아직 가닥을 잡지 못한 모양새다. 규제가 필요한 산업이긴 하지만 감독을 위한 감독이 기본 방향은 아니었으면 한다.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만약 또 한 번 글로벌 금융 위기가 찾아온다면 그 때는 진짜 국내 금융사가 구세주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손희동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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