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관세협상 이끈 ‘민간 외교관’ 이재용·정의선·김동관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부과하던 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기로 했다. 한국은 이에 맞춰 미국에 35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호관세 부과 방침을 발표한 지 168일 만에 한국과 미국이 극적으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양국 합의에 따라 자동차·조선·반도체 등 주요 품목의 관세는 15%로 인하된다. 한국은 향후 반도체·의약품 품목의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된다. 미국이 요구했던 농축산물 시장 개방은 국내 쌀·소고기 분야에서 제외된다.
관련업계는 이번 협상 타결의 배경에 정부 공식 협상과 별도로 미국으로 향한 재계 총수들의 ‘민간 외교’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자발적으로 미국에 건너가 고위급 접촉과 산업 투자 카드를 통해 관세 인하를 견인했다는 평가다.
핵심 산업 대표 총수들, 자발적 방미로 정부 협상 뒷받침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국내 핵심 산업을 대표하는 총수들은 이번 협상이 자사 사업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다고 보고, 자발적으로 힘을 보탰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31일 브리핑에서 “(총수들의 방미는) 정부가 요청한 것이 아니다”라며 “각 그룹에서도 중요한 사안으로 인식해 자발적으로 나서 노력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9일 미국으로 건너가 협상단을 측면 지원했다. 출국 직전 삼성전자는 테슬라와 약 23조원 규모의 자율주행 시스템 반도체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 회장은 현지에서 미국 내 반도체 투자 확대와 첨단 AI 반도체 기술 협력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파운드리 공장을 운영 중이다. 2030년까지 미 현지 반도체 생산 거점을 위해 370억달러(약 54조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2026년 가동 개시를 목표로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협상 마감 이틀 전인 30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현대차그룹은 4월부터 부과된 미국 자동차 관세로 2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약 20% 감소하는 등 타격을 입었다.
정 회장은 3월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4년간 210억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를 약속한 적 있다. 이번 방문에서도 자동차 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해 관세 인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정부 협상을 뒷받침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재계 인사 중 가장 먼저인 28일 협상단에 합류했다. 미국 측의 전략 분야인 조선업 협력을 통해 협상력을 높이는 역할을 맡았다. 김 부회장은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구체안을 설명했다. 1500억달러(208조5000억원) 규모의 마스가는 미국의 조선업 부흥 전략과 맞물려 이번 협상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분석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30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특파원단 간담회에서 총수들이 워싱턴 DC에 체류하며 고위급 만남을 주선하는 등 측면 지원을 한 것에 대해 언급했다.
김 장관은 "우리 기업분들이 많이 오셔서 직·간접적인 도움이 많이 됐다"며 "투자하는 지역구 상원의원과 주지사들이 (좋은) 얘기를 해줬다. 특별한 도움이 됐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트럼프 주니어 절친' 정용진 회장 불참 배경에 이목
다만 이번 민관 합동 총력전에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유통업계 총수들이 참여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재계 안팎에서는 특히 트럼프 주니어와 수차례 만남을 가진 정 회장을 트럼프 일가와의 인맥을 활용할 수 있는 유력한 채널로 꼽아왔다.
정 회장은 5월 트럼프 주니어의 방한 당시에도 국내 주요 유통 총수들과 만남을 주도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 핵심 후원단체인 ‘록브리지 네트워크’의 아시아 총괄 회장으로도 거론되며 한미 ‘민간 외교’ 창구로 평가받았다.
정치권에서도 관세협상에서 정 회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장예찬 전 국민의힘 청년 최고위원은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현재 한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빠르게 접촉 가능한 인물은 정용진 회장일 것”이라며 “정 회장은 이미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왔다”고 적었다.
이와 관련해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정 회장의 미국행과 관련해 들은 바 없다”고 밝혔다. 정부 측 인사는 “관세 협상 등 주요 정책은 비공개로 진행되는 만큼 정 회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는데 불발된 사안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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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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