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고객 주려고 쌓은 돈만 15조… 보험사, 배당 줄인 이유 있었네
8개사 전년보다 20% 증가 이익잉여금 절반 이상이 ‘묶인 돈’
국내 보험사들이 때 아닌 돈맥경화 현상을 겪고 있다. 고객에게 돌려주기 위해 쌓아두는 해약환급금준비금(해약준비금)이 크게 늘었는데, 이로 인해 활용 가능 자금이 줄었기 때문이다. 배당 여력은 물론 자칫 건전성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 전반에 커지고 있다.
11일 해약준비금을 적립한 생보사 15곳 가운데 반기보고서를 제출한 8곳(한화·신한·농협·동양·KB·미래에셋·흥국·DB생명)을 집계한 결과, 이들 회사의 준비금 잔액은 총 14조6799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12조1762억원보다 20.5%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이익잉여금 대비 해약준비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 8개 생보사의 전체 이익잉여금 중 해약환급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년 말 47.6%에서 올 상반기 56.0%로 증가세를 보였다.
해약준비금은 보험사가 고객이 계약을 해지했을 때 지급해야 할 환급금을 미리 쌓아둔 것이다. 보험사가 장부상 이익으로 남길 수 있는 돈(이익잉여금) 중 일부를, 혹시 모를 해약 사태에 대비해 묶어두라고 당국이 요구한 돈이다.
전체 이익잉여금 중 해약준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은 DB생명이다. 올 상반기 해약준비금은 1조9071억원으로 전체 이익잉여금(1조9556억원)의 97.5%에 달한다. 사실상 이익잉여금 대부분이 해약환급금준비금으로 묶여 있는 셈이다.
농협생명도 81.1%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78.5%보다 더 올라서 이익잉여금의 5분의 4가 준비금으로 묶이게 됐다. 농협생명은 규모 자체는 2조1298억원으로 신한·한화에 못 미치지만, 비중만 놓고 보면 자본 여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외에도 ▲신한라이프 61.5% ▲동양생명 57.8% ▲한화생명 51.6% ▲미래에셋생명 49.2% 등 대부분 회사들이 절반 안팎의 비율을 보였다.
준비금 적립액별로 보면 신한라이프가 가장 많다. 올 상반기 말 기준 해약준비금은 4조1560억원으로, 지난해 말 3조6381억원보다 5179억원 늘었다. 단일 회사 기준으로 가장 큰 잔액이자, 증가 폭 역시 업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 이익잉여금이 같은 기간 줄어든 탓에 신한라이프는 준비금 비중이 61.5%까지 치솟았다.
한화생명 적립액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말 2조5047억원이던 해약환급금준비금은 올 상반기 3조6312억원으로 1조1265억원 증가했다. 증가율만 따지면 신한라이프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익잉여금 대비 비중도 36.4%에서 51.6%로 절반을 넘어섰다. 규모와 증가 폭 모두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밖에도 ▲농협생명 2조1298억원 ▲동양생명 9188억원 ▲DB생명 1조9071억원 ▲미래에셋생명 9923억원 ▲KB라이프 9383억원 ▲흥국생명 62억원 등도 잔액이 일제히 늘어났다. 금액 절대 규모는 차이가 있지만, 8개사 모두 예외 없이 증가세를 기록했다.
문제는 해약준비금 부담이 증가하면서 보험사들의 배당 여력이 감소할 뿐 아니라 자칫 건전성 지표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해약준비금이 불어나면서 보험사 배당 여력은 위축되고 있다. 배당 재원은 이익잉여금에서 나오는데, 준비금을 이익잉여금에서 따로 떼어 쌓아야하기 때문이다. 준비금 적립액이 늘어날수록 주주에게 환원할 수 있는 몫이 줄어드는 구조다.
해약준비금이 건전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우려한다. 해약준비금은 원칙적으로 이익잉여금 범위 안에서는 전부 기본자본으로 인정되지만, 준비금이 이익잉여금 한도를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초과분이 보완자본으로 재분류된다. 예를 들어 회사가 가진 이익잉여금이 1만원인데 해약환급금준비금이 1만1000원까지 불어나면, 1000원은 기본자본이 아닌 보완자본으로 잡히게 된다.
현재 금융위원회는 연내 ‘기본자본 지급여력비율(K-ICS)’ 규제 도입을 예고하고 있다. 해당 규제는 최근 보험사들이 자본 확충을 위해 주로 후순위채 발행 같은 보완자본에 의존하자 총자본이 아니라 기본자본 중심으로 건전성을 평가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금융당국이 기본자본 관리 기준을 강화하려는 상황에 해약준비금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보험사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아직 해약준비금을 쌓지 않고 있는 삼성생명과 교보생명 등도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당장은 과거 고금리 계약 덕분에 장부상 부채가 환급금을 웃돌아 준비금 적립 의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현행 제도가 이어진다면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어서다. 향후 배당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보험사 CEO들은 금감원장 간담회 자리에서 해약환급금준비금 적립 규제 완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신계약을 늘릴수록 오히려 자본이 묶이는 구조 때문에 영업 확대와 주주환원이 동시에 막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의 적극적인 주주환원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약환급금준비금 제도는 정책 기조와도 충돌한다는 지적이 업계 안팎에서 제기된다.
앞서 금융당국은 일부 규제를 완화해 지급여력비율이 170% 이상인 보험사에는 준비금을 전액이 아닌 80%만 쌓도록 허용했다. 삼성생명, 미래에셋생명, KB손보, 한화손보, 흥국화재 등이 해당 조치의 수혜를 받았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런 조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근본적인 제도 손질 없이는 부담이 계속 누적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사들은 이미 킥스(K-ICS) 비율 산정 과정에서 보장성 보험은 25%, 저축성 보험은 35%까지 해약 위험을 반영하고 있다”며 “만일 보험금을 돌려주지 못할 만큼 회사가 어려운 처지에 처한다해도 MG손보처럼 가교보험사를 세워 계약을 이전하는 절차까지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추가로 이익잉여금을 묶어두는 건 과도한 규제”라고 말했다.
전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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