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론’ 우려 불구… 서학개미, 연휴기간 美 AI 관련주 폭풍 매수
3~9일 5거래일간 1조원 이상 사들여 테슬라, 아이렌, 메타, 팔란티어 순매수 상위
‘AI 거품론’에도 불구하고 ‘서학개미’는 추석 연휴 기간 인공지능(AI) 관련주 매입에 나섰다. 테슬라 등 대형주부터 팔란티어 등 중형주까지 투자 종목도 다양했다.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 AI 강세 지지론 등에 힘입은 결과로 풀이된다. 다만 투자 지표가 2000년 초반 닷컴버블 시절을 연상케 해 주의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12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한국 주식시장이 문을 닫은 10월 3일부터 9일까지 5거래일간 국내 투자자의 해외주식 순매수액은 7억1389만달러(약 1조200억원)으로 집계됐다. 직전 5거래일간(9월 26일~10월 2일)의 순매수액 4억862만달러 대비 3억달러 이상 커진 규모다.
투자금은 대부분 AI 관련주로 향했다. 이 기간 국내 투자자가 가장 많이 순매수한 종목은 테슬라 주가를 2배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인 ‘디렉시온 데일리 TSLA 불 2X 셰어즈’(TSLL)로 순매수액은 1억5117만달러였다. 비트코인 채굴기업에서 AI 인프라 기업으로 변신한 아이렌(IREN)의 순매수액이 1억462만달러로 뒤를 이었다.
그밖에 ▲메타 9951만달러 ▲테슬라 9635만달러 ▲팔란티어 7864만달러 ▲엔비디아 7171만달러 ▲퍼미 아메리카 5968만달러 ▲브로드컴 4990만달러 등도 국내투자자 순매수 상위 10위 안에 들어갔다. 지난달 서학개미의 순매수 상위 종목이 가상자산, AI, 주가지수 ETF, 바이오 등 다양하게 구성됐던 점과 대조하면 ‘AI 쏠림’ 현상이 강화된 셈이다.
우호적 투자 심리는 글로벌 기업 리더들이 AI 낙관론에 불을 지핀 영향으로 풀이된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8일 CNBC에 출연해 “블랙웰(엔비디아 제품)에 대한 수요는 정말 크고 우리는 새로운 인프라 확충의 시작점, 즉 새로운 산업혁명의 출발점에 서 있다”며 AI 강세를 재차 강조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도 6일 한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지금 당장은 일종의 거품이 있다”면서도 “이것은 단지 새로운 기술 혁명이 진행되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도 최근 AI 투자에 대해 “금융적 거품과 다른 산업적 거품”이라고 평가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하에 나서는 점도 AI 낙관론을 뒷받침한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 툴에 따르면 연말까지 연준의 정책금리가 4.00~4.25%에서 3.5~3.75%로 내려갈 확률은 79.5%로 한 달 전(64.6%)보다 15%포인트 올라갔다. 우호적 투자 심리에 힘입어 3~9일 S&P500은 0.3%, 나스닥은 0.8% 각각 상승하며 역대 최고점을 갈아치웠다.
김석환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AI 산업에 대한 낙관론을 제시하며 시장의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연준이 9월 FOMC 의사록에서 금리를 추가 인하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며 시장의 금리 인하 기대를 더 강화했다”며 “S&P500과 나스닥의 지속적인 상승세는 AI와 기술주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버핏지수 220% 돌파… “닷컴버블과 유사” 경고도
AI 관련주를 중심으로 미국 주식시장이 상승 랠리를 이어가면서 버블 논쟁도 고조되고 있다. 주가 고평가 여부를 판단하는 투자 지표는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 수준에 이르렀다. 주식시장이 실물경제 대비 고평가·저평가됐는지 판단하는 ‘버핏지수(미국 명목 GDP/주식시장 시가총액)’는 8일(현지시각) 기준 221.5%로 닷컴버블 시기인 2000년 5월(144.1%), 코로나 펜데믹 유동성 랠리 당시인 2021년 11월(194.5%)을 모두 크게 넘어섰다.
주가가 순이익 대비 몇 배로 평가되는지 나타내는 주가수익비율(PER)도 미국 주식시장은 현재 26.96배(금융정보사이트 World PE Ratio 기준)로 역대 최고점을 경신했다. 닷컴버블 시기 가장 높았던 24.74배(2000년 1월)를 웃도는 수치다.
이렇다 보니 AI에 대한 비관적 전망도 적지 않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8일(현지시각) 밀컨연구소 주최 연설에서 “AI 생산성 제고 잠재력에 대한 시장의 낙관적인 심리가 갑자기 전환될 수 있고 그럴 경우 세계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은행(BOE)의 금융정책위원회도 같은 날 공개한 회의록에서 “AI 붐이 2000년 닷컴버블 붕괴 당시와 비슷하다”며 “갑작스러운 조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증권가는 AI 투자가 혁명인지 거품인지는 3분기 실적에서 판가름 날 것으로 보고 있다. 문남중 대신증권 연구원은 “S&P500 내 3분기 EPS(주당순이익) 가이던스를 발표한 112개 기업 중 긍정적 가이던스를 발표한 기업 수가 5년·10년 평균을 상회하고 있고 특히 IT 섹터는 전체 11개 섹터 중 긍정적 가이던스를 발표한 기업 수가 가장 많다”며 “이는 AI 낙관론 확산에 힘을 보탤 것이고 연말까지 상승 과정 속 얕은 조정은 비중확대 기회”라고 말했다.
이웅찬 iM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이익 성장이나 Capex(자본적 지출) 규모를 따진 것과 달리 오픈AI가 엔비디아 자금을 유치하고 AMD 칩을 사겠다는 미래의 약속만으로 주가가 급등한 것은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모습”이라며 “9월 이후부터는 매크로(거시경제)보다는 마이크로(개별기업 실적) 요인들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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