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기능 무너뜨린 부동산 대책 [줌인 IT]
금리는 위험의 대가이자 가격이다. 시장경제가 형성되기 전 고대에도 곡식과 은(銀)을 빌려주고 이자를 더해 돌려받는 관행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자금의 흐름을 전문적으로 중개하는 기관이 등장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은행이다. 은행은 돈이 필요한 곳과 남는 돈을 연결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위험을 판단해 값을 매긴다.
우리나라의 금리 체계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정부가 예금과 대출 금리를 직접 통제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시장 자율에 맡기는 방향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를 중심으로 은행들은 자금조달 비용과 신용위험, 담보, 만기 등을 반영해 스스로 예·대금리를 산정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금리는 ‘위험에 대한 평가’에 기반한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구조 속에서 담보 가치가 높고 상환 능력과 의지가 확실한 차주에겐 낮은 금리를, 반대로 상대적으로 신용위험이 큰 차주는 높은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 됐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이 원칙을 흔들고 있다. 직접 금리를 정하지는 않지만 각종 정책과 규제를 통해 시장의 방향을 사실상 통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서민 부담 완화와 금융 상생을 내세우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장이 위험을 평가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기능을 약화시키는 꼴이다. 금리가 행정의 도구가 되면 위험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시장의 신호는 왜곡된다.
원칙을 흔드는 결정적 한마디는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다. “금융이 너무 잔인하다”며 “금융이 고신용자에게는 저이자로 장기를, 저신용자에게는 고리로 단기를 빌려준다”고 지적했다. 이 당연한 얘기가 권력자에게는 모순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현실이다.
서민 등 취약차주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지만 문제는 접근 방식이다. 고신용자에게 금리를 더 물리고, 저신용자에게 인위적으로 낮춰주는 식의 조정은 시장의 위험 평가 기능을 무너뜨린다. 위험이 높은 대출의 비용을 신용 좋은 차주가 떠안는 구조로 변질되고, 금융의 신뢰 사슬은 더욱 약해진다.
고신용은 성실하게 이자를 갚고 경제활동을 해 온 결과다. 다른 장치 없이 고신용자라는 이유로 금리를 더 부담하게 된다면 성실하게 이자를 갚아나갈 차주는 없다.
금리 왜곡은 벌써 시작됐다. 정부의 부동산 대출 규제 강화 이후에는 주담대 금리가 중소기업 대출 금리보다 높아지는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통상 주담대는 담보가 안정적인 만큼 부실 가능성이 더 높은 중소기업 대출의 금리보다 낮게 형성되기 마련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예금은행의 8월 중소기업 대출 금리는 4.07%로, 변동형 주담대 금리(4.08%)보다 0.01%포인트 낮았다. 두 금리가 뒤집힌 것은 2022년 4월 이후 3년 4개월 만이다. 금리에 반영돼야 할 ‘위험도’가 역전된 것으로 시장의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민주당 정권의 재등장 이후 다시 반복되는 일이라는 점도 공교롭다.
이는 최근의 부동산 정책가 무관치 않다. 정부의 ‘10·15 규제’는 수도권과 규제 지역 집값이 15억원을 넘으면 4억원, 25억원을 넘으면 2억원만 빌릴 수 있도록 제한했다. 상환 능력과 무관하게 집값 구간으로 일률 제한을 둔 것이다. 연소득이 충분하고 신용이 우수한 사람이라도 집값이 25억원을 넘는 순간 2억원 이상은 빌릴 수 없다. 돈을 갚을 능력이 있어도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신용과 상환 능력이라는 금융의 기본 원칙이 사라진 금리는 은행의 기본 제도가 될 수 없다. 대출을 이미 받은 사람이 승자가 되고 같은 조건의 직장인이나 청년은 하루아침에 패자가 되는 구조를 만들어선 안된다.
이 정부 들어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며 세 차례 대출 규제를 내놨지만, 집값은 오히려 뛰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의 시즌2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경제는 심리다.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사라지면 신뢰도 무너지고 불안은 높아진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해야 할 때다.
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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