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이후 ‘AI G3’ 향한 한국의 새 좌표 [윤석빈의 Thinking]
최근 폐막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는 단순한 경제 협력의 장을 넘어 디지털 무역과 기술 표준을 둘러싼 치열한 '총성 없는 전쟁'의 현장이었다. 특히 인공지능(AI)은 각국의 미래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변수를 넘어 국가 안보 및 지정학적 패권의 '핵심 자산'으로 그 위상이 격상됐음을 재확인시켰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AI 공급망(반도체-클라우드-데이터) 전반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APEC을 기점으로 가시화된 '신뢰할 수 있는 AI(Trustworthy AI)'와 '데이터 거버넌스' 논의는 한국에게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이제 한국은 AI 분야의 ‘G3'로 도약하기 위해 기존의 전략을 전면 재검토하고 새로운 '표준 설계자(standard-setter)'로서의 좌표를 설정해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번 APEC에서 논의된 디지털 경제 의제, AI 윤리 및 거버넌스 원칙은 경제 블록화가 기술 블록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뢰'와 '안보' 기반의 AI 공급망 재편은 한국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AI 풀스택(Full-Stack) 전반에서 완결된 가치사슬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등 AI 반도체 하드웨어의 절대 강점을 가졌지만, AI 모델을 구동하는 클라우드 인프라는 AWS, 구글, MS 등 미국 빅테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또한, AI 모델의 핵심인 LLM(거대 언어 모델) 분야에서도 네이버, LG, 업스테이지 등 국내 기업들이 선전하고 있으나 오픈AI, 구글 등과의 글로벌 스케일 경쟁은 여전히 버거운 상황이다.
APEC의 논의는 이러한 '종속성'이 단순한 비용 문제를 넘어 향후 AI 주권(AI Sovereignty)의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AI 반도체 수출 통제나 클라우드 서비스 정책이 언제든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PEC 이후 한국의 제1 전략은 'AI 풀스택'의 완성도를 높여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우리 것도 만들자'는 구호가 아닌 한국이 가장 잘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한 전략적 선택과 집중을 의미한다.
첫째, 'AI 반도체'의 초격차를 시스템 반도체와 AI 가속기(NPU) 분야로 확장해야 한다. HBM의 성공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리벨리온, 퓨리오사 등 국내 팹리스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NPU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대안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더불어, 이들 칩을 즉각적으로 테스트하고 도입할 '국내 클라우드 인프라'와의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
둘째, '국산 AI 클라우드'의 체력을 키워야 한다. 최근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언급한 '한국 시장 26만 개 그래픽처리장치(GPU) 공급' 계획은 K-AI 인프라 확충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인 동시에 특정 하드웨어에 대한 심각한 종속성을 재확인시키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 막대한 연산 능력을 국내 AI 생태계가 온전히 흡수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AI 주권의 최종 보루인 '국산 AI 클라우드'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AI 주권은 결국 자국의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플랫폼 위에서 구현된다. 국내 클라우드 등이 이 GPU 인프라를 기반으로 공공 및 금융 부문을 넘어 민간 시장에서도 미국 빅테크와 경쟁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과 함께 'K-AI 풀스택 얼라이언스(반도체-클라우드-LLM)'를 구축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야 한다.
이번 APEC의 또 다른 핵심 화두는 'AI 거버넌스'였다. EU가 'AI 법(AI Act)'으로 강력한 규제 드라이브를 거는 가운데 미국과 APEC 회원국들은 보다 유연하고 산업 친화적인 표준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은 이러한 글로벌 표준 논의에서 '수용자'의 입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는 AI 후발주자의 전략이다.
한국은 AI 기술력과 더불어 '신뢰할 수 있는 AI' 거버넌스 체계를 선제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새로운 '수출 상품'이자 '소프트 파워'로 활용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이 'K-AI 안전성 및 신뢰성 인증' 모델을 개발해 아시아의 표준으로 제시하는 전략이다. 이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한국의 AI 서비스와 제품이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품질 보증 마크가 되어 글로벌 시장 진출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윤리적 AI, 설명 가능한 AI(XAI) 분야의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은 우리가 '표준 설계자'로 나아가는 핵심 지름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AI 전략의 무게중심은 '범용 AI(AGI)'나 LLM 자체의 성능 경쟁을 넘어, 한국의 전통적 강점인 '산업'과의 융합으로 이동해야 한다.
APEC이 강조한 '공급망 안정'과 '제조업 혁신'이야말로 K-AI가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헬스케어, 물류, 콘텐츠(K-Culture) 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전략은 '세계 1등 LLM'을 만드는 것(물론 중요하지만)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반도체 제조 공정을 위한 세계 1등 AI', '조선 해양 물류를 위한 세계 1등 AI', '글로벌 팬덤을 관리하는 세계 1등 엔터테인먼트 AI'를 만드는 '버티컬 AI(Vertical AI)' 전략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는 AI의 ROI(투자수익률)를 극대화하고 타국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산업 특화 AI'라는 강력한 해자를 구축하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APEC 이후 한국 AI는 'G3'라는 목표를 향한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K-AI 풀스택' 완결성을 통한 '기술 주권' 확보 ▲'AI 거버넌스' 표준 설계를 통한 '외교적 리더십' 확보 ▲'산업 특화 AI' 심화를 통한 '경제적 실리' 확보다. 한국은 반도체와 IT 인프라, 우수한 인재라는 강력한 DNA를 가졌다. 이제는 흩어진 구슬을 꿰어 'AI 표준 강국'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전략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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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빈 트러스트 커넥터 대표는 서강대 AI·SW 대학원 특임교수로 투이컨설팅 자문과 한국 경영학회 디지털 경영 공동위원장, 법무 법인 DLG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오라클과 한국 IBM 등 IT 업계 경력과 더불어 서강대 지능형 블록체인 연구센터 산학협력 교수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