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채권 안팔아"… 돈 걷고도 닻 못 올리는 배드뱅크
사업 속도 더뎌… 반쪽짜리 우려도
새 정부의 장기 연체자 빚 탕감 프로그램인 배드뱅크(새도약기금)가 출범 한 달여 만에 은행권 분담금 기준을 확정하는 등, 본격적인 설립 재원 마련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엉뚱한데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모습이다. 부실 채권을 내놓아야 할 대부업권이 협약 참여를 미루면서 사업 진행에 속도가 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국은행연합회는 장기 연체자의 부채 탕감을 지원하기 위한 새도약기금 출연금 산정 기준을 각 은행의 당기순이익으로 결정했다. 부실에 대비해 미리 비용으로 쌓아두는 대손준비금까지 반영했다. 자산 규모나 세전이익 등 다양한 안이 검토됐지만 실제 영업성과를 가장 정확히 반영한다는 이유에서다.
새도약기금은 총 8400억원 규모로 정부 재정 4000억원과 금융권 출연금 4400억원으로 조성된다. 이 중 은행권 부담액이 약 3600억원이다. 업계에서는 이 기준에 따라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이 400억~550억원 수준을 분담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가계대출 비중이 낮다는 이유로 감액 조정이 논의됐다.
은행권을 시작으로 여전사 300억원, 생명·손해보험사 400억원, 저축은행 100억원 등 업권별 분담 기준도 순차적으로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새도약기금은 금융위원회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장기 연체자 재기 지원 프로그램이다. 금융권이 보유한 7년 이상·5000만원 이하 무담보 연체채권을 매입해 소각하거나 채무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부실채권 매입이다. 정작 채권을 내놓아야 하는 대부업권의 참여가 소극적이다. 최근 수익성 악화는 물론 부실 채권 증가로 연체율 상승으로 채권을 내놔야 하지만, 정부가 제시한 매입가율로는 수지타산이 안맞다는 이유에서다. 시장 상황이 개선됐을 때 채권을 매각하면 지금보다 높은 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대부채권매입추심업자들의 평균 매입가율은 29.9% 수준이다. 정부가 제시한 새도약기금의 평균 매입가율은 5% 내외다. 단순 계산 시 상단 기준으로도 약 15%포인트 차이가 난다. 대부업체가 100만원짜리 빚을 약 30만원에 사들였다면, 새도약기금은 이 빚을 평균 5만원 정도에 사겠다는 뜻이다.
이에 금융업계에서는 대부업체나 여신회사 등이 손해를 감수할 만큼의 유인책이 없다면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캠코에 따르면 새도약기금 대상 채권 중 대부업권 물량은 6조7000억원으로, 카드(1조9000억원)·은행(1조2300억원)·보험(6400억원)·상호금융(6000억원)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이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새도약기금의 핵심 취지인 ‘연체채권 정리’는 반쪽에 그칠 수밖에 없다.
현재 새도약기금 협약에 참여한 대부업체는 12곳에 불과하다. 상위 10개사 중에서는 단 1곳뿐이다. 새도약기금 출범 이후 40여 일이 지났지만 추가 협약에 나선 대부업체는 없는 상태다.
대부업체 만큼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부실 채권을 팔아야 하는 여신업계와 상호금융권의 기류도 다르지 않다. 업계에서는 정부 기조에 따르겠다는 입장이지만 “출연금을 내고 부실채권까지 팔라는 건 이중 부담”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혜자 책임 원칙이란 게 있는데, 업권 내에서는 누구도 수혜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다만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국정감사에서 “협약에 참여하는 대부업체에 ‘우수 대부업자’와 유사한 수준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만큼, 인센티브 규모에 따라 향후 참여 분위기가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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