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로 머니 무브… 예금 빠진 은행, 저축은행보다 높은 금리 유혹
코스피가 4200선을 넘나드는 이른바 ‘불장(불 같은 장세)’이 이어지면서 시중 자금이 증시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 요구불예금(저원가성 예금)에서 빠져나간 자금 규모가 한 달여 만에 20조원을 훌쩍 넘어서자 은행권은 기준금리가 동결된 가운데서도 예금 금리를 잇따라 올리며 수신 방어에 나서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금리가 저축은행 금리를 역전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16일 은행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은행들이 예금 금리를 올리며 수신 고객 잡기에 나섰다. SC제일은행은 최근 ‘e-그린세이브예금’의 최고 금리(12개월 만기)를 기존 연 2.85%에서 연 3.0%로 올렸다. 우대금리를 모두 합한 최고 금리는 연 3.10% 수준이다.
농협은행의 ‘NH올원e예금’은 연 최고 2.86%, 하나은행(하나의정기예금)과 우리은행(WON플러스예금)은 각각 연 최고 2.80%의 금리를 제공한다.
이는 79개 저축은행 전체 정기예금 금리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날 기준 저축은행 가운데 3% 금리를 제공하는 12개월 만기 예금 상품은 없다. 참저축은행의 e-정기예금이 연 최고 3.0%를 제공하지만 6개월 단기 상품이다.
정기예금의 평균 금리를 비교해도 시중은행이 높다. 5대 시중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의 평균 금리(12개월 만기)는 2.71% 수준이다. 저축은행은 2.67%로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자금 조달 수단이 예금으로 한정된 저축은행이 은행보다 더 높은 금리로 수신을 유치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장면이다.
이는 최근 시장 금리 상승과 주식시장 급등세에 은행의 요구불예금이 급격하게 빠져나간 것이 영향을 미쳤다.
요구불예금은 고객이 언제든지 바로 찾아서 쓸 수 있는 예금이다. 금리가 0%에 가깝지만 고객이 꾸준히 일정 잔액을 유지하기 때문에 은행 입장에서는 조달 비용이 가장 낮은 ‘핵심 예금’으로 분류된다.
이 예금이 많을수록 은행은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확보해 대출 등으로 운용할 수 있어 수익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요구불예금이 빠져나가면 조달 비용이 상승해 정기예금 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
최근 증시 호황으로 투자자들이 은행에서 자금을 빼 주식계좌로 이동시키는 ‘머니무브’가 나타나면서 요구불예금이 큰 폭으로 감소했고, 시중은행의 금리를 올리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셈이다.
시중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지난달 말 647조8564억원으로 한 달 사이 21조원 넘게 줄었다.
반면 고객이 증권사 계좌에 맡겨 놓은 잔고 총액인 투자자예탁금은 지난 5일 기준 88조2708억원까지 치솟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투자자예탁금은 증시 대기 자금으로 주가 상승기에 비례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용거래융자 잔고 역시 25조8000억원을 넘어섰다. 저금리 기조에서 ‘빚투(빚내서 투자)’가 정점이었던 지난 2021년 9월 25조6000억원을 웃돈다.
수신 금리 상승은 연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시장금리 상승세와 함께 12월·1월은 대규모 예·적금 만기가 몰리는 시기여서다. 은행권에선 매년 이 시기 수신 확보를 위해 금리를 올리거나 특판을 진행한다.
다만 무리한 수신 경쟁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저축은행업계는 대출 축소와 PF 부실 회수 부담이 커지면서 무리한 수신 확보에 나서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뚜렷한 상황이다. 저축은행의 수신 잔액은 지난 2분기 중 100조원대 아래로 떨어졌다가 8월 100조원대를 회복해 9월 말 105조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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