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I,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한국 이차전지 생산 기업들이 중국 정부의 전기차 배터리 인증 기준 강화안에 아무런 대응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 때 이차전지 강국으로 불렸던 한국이지만 세계 최대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서의 비즈니스가 사실상 불투명해지면서 성장의 정체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국내 배터리 업계가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시장 공략에 난항을 겪고 있다. / LG화학 제공
국내 배터리 업계가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시장 공략에 난항을 겪고 있다. / LG화학 제공
한국 이차전지 3사는 자구책을 마련하기보다, 중국 정부가 관련 업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인증 기준을 다소 완화해줄 것만을 기대하면서 사실상 사태를 관망하고 있어 위기대응 및 전반적인 사업 전략이 부실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 전망이다.

중국 공업신식화부는 11월 22일 발표한 2017년 시행 예정인 전기차 배터리 모범규준 개정안에서 인증 획득 요건으로 중국 내 연간 이차전지 생산 능력이 8기가와트시(GWh) 이상이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기존 200메가와트시(MWh)보다 40배나 높아진 수치다. 또 최근 2년간 배터리 관련 중대 사고를 겪은 일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했다.

삼성SDI, LG화학, SK이노베이션은 앞서 4차까지 진행된 인증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던 만큼 5차 인증 획득에 사활을 건다는 방침을 내걸었으나, 이번 개정안 발표로 패닉(공황)에 빠졌다. 2014년 중국에 이차전지 생산 공장을 설립한 삼성SDI와 LG화학의 이차전지 생산 능력은 각각 연간 2.5GWh 및 3GWh 수준이다. 이 기준에 부합하는 생산 능력을 갖춘 기업은 연간 12GWh의 생산 능력을 갖춘 중국의 비야디(BYD) 정도다.

관련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이차전지 굴기(崛起)에 나선 중국이 한국 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한 꼼수를 부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2년간 무사고 조항은 갤럭시노트 7 발화 사건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삼성SDI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한국 이차전지 3사는 중국 정부의 발표 이후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대책 없이 중국 정부의 처분만 기다리는 입장이다.

삼성SDI 관계자는 "아직 중국 정부가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향후 진행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태"라며 "중국 공장도 현재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다"고 말했다.

LG화학 관계자도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중국 시장이 중요하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된 바가 없어 언급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당장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은 맞지만, 이번 일로 현지 파트너와 진행 중인 사업을 중단하거나 투자를 철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앞서 4차에 걸친 인증에서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안일한 대응에 머물렀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매번 기존 인증에서 지적된 탈락 원인을 보완하는 조치 외에 중국 정부의 요구사항을 예측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가 사드(THAAD) 배치 등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 이차전지 3사에 무역보복을 가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자국 기업들에게 더 불리한 조건을 내걸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관측도 나온다.

중국은 앞서 4차에 걸쳐 전체 120여개 기업 중 절반에 가까운 56곳의 기업에 인증을 부여했다. 56곳 중 54곳이 중국 기업으로, 대부분 한국 배터리 3사에 비해 생산 능력이 떨어진다. 중국 정부가 기존 인증 획득 기업에게도 새 기준을 소급 적용할 것인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만약 그대로 적용할 경우 전기차용 중대형 이차전지 제조사로서는 BYD 외에 사실상 살아남는 기업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이 4차 인증까지는 자국 배터리 기업의 양적 확대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질적 확대를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인증 기준을 높임으로써 해외 기업이 중국 현지 투자를 늘리거나, 신규 진입을 희망하는 자국 기업들이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우도록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LG화학의 올랜도 공장이나 테슬라의 기가 팩토리를 확보한 미국처럼 자국 내에 안정적인 생산 기반을 보유한 기가 스케일(규모)의 기업을 영입하려는 의지를 보여왔다.

하지만 한국 배터리 3사는 중국의 이러한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기술력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만 강조해왔다. 네 번이나 인증 획득에 실패하고도 매번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올해 8월까지만 해도 4차 인증 탈락 당시 문제가 됐던 차별 규정을 중국 정부가 스스로 철회하자, 국내 이차전지 업계는 마치 5차 인증을 따논 당상처럼 여겼다.

한국 정부의 역할도 아쉽다. 정부가 외교력을 바탕으로 중국 공업정보화부의 정책 설정 방향을 예측하고, 한국 기업에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한국 이차전지 3사가 현지화 전략 수립에 실패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대미문의 갤럭시노트 7 발화 사건을 신속하게 매듭짓지 못한 점도 한국 이차전지 업계에 악재가 됐다.

이차전지 전문가 박철완 박사(전 차세대전지성장동력사업단 총괄간사)는 "이번 인증 신청이 처음도 아니고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던 만큼 여러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대응방안을 미리 마련해놓고 있었어야 했는데, 이번 사태는 국내 이차전지 기업들이 모든 일에 얼마나 근시안적으로 대처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국은 이번 인증 기준 강화 조치로 전기차용 이차전지 양산 능력에서 한국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는 자신감을 보여줬다"며 "중국이 제시한 8GWh라는 숫자도 결코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오히려 한국 기업들이 이 정도 규모를 예측 못하고 진도를 맞추지 못한 게 더 큰 문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