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속 꽃에 대한 에피소드
2년 전 가입한 한 SNS의 비공개 야생화동호회에서는 가끔 꽃에 대한 댓글 격론이 벌어지곤 한다. 구분이 애매한 꽃 사진에 대한 분분한 의견으로 인한 것이 대부분인데 거의 모든 경우 오랜 기간 활동을 하며 내공을 쌓은 몇몇 리더급의 의견 일치로 귀결되거나 한둘로 나누어진 의견에 줄서기를 하며 마무리 되곤 한다. 꽃으로 벌어 먹고사는 이쪽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면서도 현장 경험치가 여간 아닌 사람들이 많아 나 역시 중간 쯤 슬며시 꼬리를 내리거나 '좋아요'만 누르는 소극적인 참여 후 결론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 몇 명을 빼고는 생면부지간인 회원들과 벌인 논쟁 중에 한참 지나도 잊혀 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1년 전쯤 회원 한 분이 올린 사진 속 식물을 두고 밤늦도록 댓글전이 벌어진 일이 있는데,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한 장의 사진 속에 우연히 찍힌 들꽃에 대한 것이었다.
◆ 여류화가의 마지막 작품 속에 핀 할미꽃
아래 그림은 1935년 화가 정찬영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작품 '소녀'다. 정찬영은 나혜석과 더불어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화가로 큰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프랑스 유학을 통해 인상주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던 나혜석과는 달리 일본에서 유학한 화가 이영일로부터 국내에서 사사한 정찬영의 그림은 일본의 채색화풍이다.
이 그림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주로 동식물과 정물만을 그림 소재로 삼았던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인물화라는 점도 특이하다. 원화가 소실되어 도록(圖錄)으로만 전해지는 이 그림은 도록의 사진조차 색이 바래지고 희미해 완전하지 않지만 소녀의 초점 잃은 시선과 텅 비어있는 봄나물 바구니는 왠지 서러운 느낌이 드러나 있다. 당시 평단에서는 '미전 회장에 쪼그려 앉아 인기와 선전을 얻은..', '일폭 채화에서 조선의 정조와 분위기를 볼 수 있고, 조선의 봄을 볼 수 있다'며 치켜세웠지만 그림의 분위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형식적으로 한 상찬으로 보인다.
봄볕에 쪼그려 앉은 소녀의 발치에 핀 꽃은 개나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들꽃인 할미꽃이다. 왜 이전 자신의 그림들과는 전혀 다르게 화려하지 않은 들꽃 몇 송이와 소박하고 불쌍해 보이는 소녀를 그려 무기력한 조선의 정서를 담으려 했는지 의도가 매우 궁금하다. 이 그림을 그린 1935년 이후 별다른 그림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녀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었을까? 당시에 그림을 배웠던 그녀의 그림이 일본 채색화풍이라는 시선에 대한 반성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자신의 작품에 무슨 꽃을 그릴지 스스로 결정했을 일이지만 한 번쯤 식물학자인 남편과는 상의하지 않았을까? 기록에 따르면 식물학자였던 남편 도봉섭(우리나라 최초의 식물명집인 「조선식물향명집(1937)」의 공저자) 교수는 귀국 후 서울약전 교수로 재직하면서 회기동에 집을 짓고 우리나라 꽃들로 정원을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가꾼 꽃들 중에서 개나리, 진달래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봄을 알리는 가장 한국적인 꽃 중의 하나인 할미꽃을 추천하지 않았을까? 할미꽃 학명의 종(種)명칭이 'koreana'로 붙여졌을 만큼 한국 특산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빼앗긴 강산에서 봄을 기다리는 정서를 담기에 딱 맞는 꽃이란 것을 남편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식물조사나 연구기록을 제외하면 일제 강점기 중 우리나라에서 꽃에 대한 사진과 그림 기록들은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피폐해진 정서가 꽃을 완상할 여유를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웃음과 행복, 축복과 위안이라는 보편화된 정서를 지닌 꽃에 대한 당시의 기록이 드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일본인들이 기념품으로 제작해 팔던 당시 조선 기생의 사진들, 일본 사람들이나 조선 부자들이 드나들던 조선호텔의 장미원 사진, 남의 나라 왕궁을 훼손해 버젓이 지어진 창경궁 식물원에 대한 사진기록물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사진들 속에는 화려함 이외에 걸러지는 정서가 담겨져 있지 않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보고 싶다.
이상화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 구절이다. 시에서 말한 맨드라미는 민들레, 들마꽃은 제비꽃을 그리 부른 것이다. 엉겅퀴, 여뀌, 할미꽃, 민들레, 제비꽃... 봄이 되면 어김없이 피던 그 꽃들은 당시의 사진과 그림과 문학 속에서 좋은 날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을 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현은 하되 의도를 감추어야하는 시대에 예술가와 작가가 감추어둔 코드의 매개체로서의 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록 화려하게 피지는 않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꽃은 늘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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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원 박사는 건국대 식물학 박사로 네덜란드 와게닝겐UR 국제식물연구소 방문연구원과 북극다산과학기지 하계연구단 고등식물연구책임자로 역임한 바 있습니다. 건국대, 강원대, 강릉대 강사를 지내고 현재 농촌진흥청 화훼과장으로 한국원예학회, 한국식물생명공학회, 도시농업연구회 이사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한국식물학회, 한국육종학회 정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