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바와 웨스턴디지털(WD)이 도시바메모리 매각 과정에서 법정 소송을 벌이는 등 갈등이 커지는 가운데, 29일 차세대 96단 3D 낸드플래시를 세계 최초로 공동 개발했다고 발표해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도시바는 28일 WD가 도시바메모리 매각을 방해했다며 1200억엔(1조20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바로 다음 날 깜짝 발표가 나온 것이어서 반도체 업계의 해석이 분분하다.

도시바와 웨스턴디지털이 29일 발표한 96단 3D 낸드플래시. / 웨스턴디지털 제공
도시바와 웨스턴디지털이 29일 발표한 96단 3D 낸드플래시. / 웨스턴디지털 제공
3D 낸드플래시는 평면 구조의 메모리 칩을 수직으로 쌓아올려(적층) 집적도를 높인 제품이다. 적층 단수가 높아질수록 같은 크기의 공간에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고, 성능도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는 64단 낸드플래시를 현재 양산 중이고, SK하이닉스는 72단 낸드플래시를 하반기 양산한다.

도시바와 WD가 개발했다고 밝힌 96단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제품보다 한 세대 앞선 기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양사의 발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96단 낸드플래시 생산을 위한 프로토타입 형태의 다이(Die)를 구현했다는 점 외에 특이점은 없다. WD는 2017년 하반기 OEM 고객에게 샘플을 공급하고, 2018년부터 시험 생산을 시작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차세대 낸드플래시 개발을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90단 이상의 수직 적층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을 끝냈고, SK하이닉스도 72단 이후 96단, 128단 3D 낸드플래시 제품까지 내다보고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차세대 낸드플래시의 본격적인 양산 시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삼성전자 한 관계자는 "차세대 낸드플래시 기술 개발을 완료했더라도 시제품 제작 후 양산에 들어가려면 보통 1년에서 1년 반이 필요하다"라며 "삼성전자도 차세대 낸드플래시 원천 기술을 확보했지만, 구체적인 양산 시점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도 "샘플이 아니라 프로토타입 단계의 경쟁사 기술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라며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주력으로 공급되는 제품은 48단 256Gb 제품으로, 90단 이상 제품이 시장에 등장할 시점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도시바와 WD는 도시바메모리 매각을 두고 갈등을 빚고 있지만, 정작 급한 쪽은 도시바다. 도시바는 하루빨리 도시바메모리를 매각하고, 매각 대금으로 자본잠식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반도체 업계 일각에서는 도시바가 96단 낸드플래시 기술 발표를 통해 WD와의 조인트 벤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과거 도시바는 샌디스크와 낸드플래시 핵심 생산 거점인 일본 미에현 요카이치 공장을 공동 운영하는 조인트 벤처를 만들었고, WD는 2015년 샌디스크를 인수한 후 조인트 벤처 권리를 양도 받았다.

WD는 이번 발표로 도시바와의 오랜 파트너십 관계와 양사 간의 시너지 효과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웨스턴디지털은 96단 낸드플래시 개발 소식을 전한 보도자료에서 "(요카이치 공장은) 일본에 있는 합작 투자 제조시설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도시바가 한 때 한·미·일 연합에 WD를 합류시키는 것을 고려한 것도 불화가 지속될 경우 양쪽이 모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라며 "양사가 분쟁을 지속하는 와중에도 차세대 낸드플래시 개발 성과를 내놨다는 것은 앞으로도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도시바는 21일 도시바메모리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 대상자로 SK하이닉스를 포함한 한·미·일 연합을 선정하고, 최종 계약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다. 도시바와 한·미·일 연합의 계약이 성사되려면 웨스턴디지털과의 소송 문제가 해결돼야 하고, 각국의 독점금지법 심사도 통과해야 한다. 도시바와 웨스턴디지털과의 중재 재판은 미국 캘리포니아 상급법원에서 7월 14일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