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계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미국 퀄컴 인수를 포기했다. 브로드컴은 2017년 11월 이후 퀄컴에 구애를 보냈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지 이틀 만에 인수 포기 의사를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 안보를 내세우며 외국 자본의 미국 내 진입을 여러 차례 막자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으나, 미국 내부에서는 이번 결정에 대해 환영의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14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브로드컴은 이날 성명을 통해 "실망스럽지만, 퀄컴 인수를 막는 미국 행정명령을 따르기로 했다"며 "브로드컴 이사회와 경영진은 그동안 브로드컴 주주와 퀄컴이 보여준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싱가포르계 반도체 회사 브로드컴 이미지. / 브로드컴 페이스북 갈무리
싱가포르계 반도체 회사 브로드컴 이미지. / 브로드컴 페이스북 갈무리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국가안보를 이유로 브로드컴이 퀄컴을 인수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권고에 따라 행정 명령에 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CFIU는 지난 5일 퀄컴에 주주총회를 한 달 뒤로 연기하라고 명령했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외국 기업과 미국 기업 사이의 인수합병(M&A)이 진행될 경우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닌지를 놓고 조사를 진행해왔다. 미국 정부는 브로드컴이 퀄컴을 인수할 경우 퀄컴의 5G 기술 개발 속도가 더뎌지고, 관련 기술이 미국 밖으로 유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브로드컴은 7일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양성하기 위해 15억달러(1조6005억원)의 기금을 조성할 것을 약속한다"며 "브로드컴은 5G 시대에 맞춰 미국이 글로벌 리더가 되는데 전념하고 있으며, 중요한 시설은 미국에 둘 정도로 미국 기업이나 진배없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는 결국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를 막았다.

트럼프 정부는 이전에도 국가 안보를 이유로 외국 기업의 미국 기업 M&A 시도와 미국 내 진입을 허용하지 않은 전례가 있다. CFIUS는 중국 알리바바 금융계열사 앤트파이낸셜의 미국 머니그램 인수, 래티스 반도체와 중국 정부의 공동 투자회사 설립 등을 반대했다. 당시에는 미국 내부에서조차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수입산 철강・알루미늄에 각각 25%, 10%의 관세를 매기도록 지시하면서 보호무역주의 논란을 가속화됐다.

하지만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합병을 막은 트럼프가 맞았다'는 제목의 사설을 내고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를 좌절시킨 것을 지지했다. NYT가 철강・알루미늄 고율 관세에 우려를 나타냈던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NYT는 "5G는 더 빠른 인터넷 속도를 제공하고 무선 업계에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다"며 "브로드컴은 퀄컴을 인수할 경우 연구개발비 지출을 줄여 5G 개발 능력을 떨어뜨리고 결국 중국 기업에 유리한 자리를 내주는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NYT는 이어 "프랑스를 비롯한 여타 국가는 '국가 챔피언'급 회사를 보호한 역사가 있지만, 미국은 그러기를 꺼렸다"라며 "휴대폰, 컴퓨터부터 자동차, 전투기 등 모든 분야에 사용되는 칩을 공급하는 반도체 회사의 경쟁력 저하를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IT 전문 매체 시넷 역시 "모두 5G 때문이다"며 "CFIUS는 거래가 성사되고 규제 검토를 시작하는 전례를 깨고, 퀄컴이 브로드컴과의 인수 계약에 합의하기 전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고 말했다.

시넷은 "일련의 신속한 조치는 미국 정부가 5G 무선 기술을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고급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는 퀄컴 칩이 거의 다 탑재돼 있으며, 퀄컴은 5G에 엄청난 금액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한편,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2017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싱가포르에 있는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후 퀄컴 인수 의지를 나타냈다.

퀄컴은 "브로드컴이 퀄컴 가치를 저평가했다"며 인수 제안 거절 의사를 재차 밝혔고, 브로드컴의 인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2월 NXP 인수 금액을 높이는 조처를 했다.

브로드컴은 퀄컴에 제안한 인수 금액을 낮추면서 대응에 나서는 한편, 미국 정부의 보안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 명령을 내리면서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다만, 브로드컴은 싱가포르에 있는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