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의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 질병 분류 결정을 둘러싸고 한국 의학계와 게임업계, 정부부처, 정치권까지 들썩인다. 이에 해외 의료계는 고작 WHO의 권고 수준 ICD-11 의결 내용을 놓고 한국에서 벌어진 시끄러운 잡음을 영 이해하지 못한다. ‘정치권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다는 시각이다.

. / 테크크런치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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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WHO가 게임이용장애(게임중독)를 질병으로 분류한 것과 관련해 법, 제도 정비 논의에 착수했다. 각 부처별 입장이 크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앞서 5월 28일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간부회의에서 문체부와 복지부 간 엇박자를 질책했다. 이 총리는 이날 "정부는 몇 년에 걸쳐 민관협의체를 운영하고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지혜로운 해결방안을 찾겠다"며 "국무조정실은 복지부와 문체부 등 관계부처와 게임업계, 보건의료계, 법조계,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윤관석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더불어민주당) 역시 같은 날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어리석은 부처 이기주의를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며 "게임중독은 언젠가 터질 화산 같은 이슈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잘 정리해 산업도 살리고 건강도 지키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 모두 적절한 지적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나왔더라면 말이다. 이 국무총리 발언과 조치는 그간 두 부처가 치열하게 싸울 때 한번도 나온 적이 없다. 윤 수석부의장 발언은 바람직한 비전 제시임에도 그간 게임 규제가 대부분 정치권발이었다는 점에서 평가절하될 수 밖에 없다.

◇ 한국만 ‘시끌’ 美·日은 ‘조용’

의료계와 게임업계, 복지부와 문체부가 큰 이견 차이를 보이며 잡음을 일으킨 것에 비해, 한국보다 큰 시장을 가진 미국과 일본에선 글로벌 게임업계 대변인 ESA의 WHO 결의 반대 성명을 제외하면 조용한 편이다.

일본 정신과 전문의 기무라 타카히로는 "WHO 게임이용장애(6C51)는 단지 질병코드로 분류된 것 뿐이다"며 "아무런 강제성 없는 코드에 한국이 시끄러운 것은 정치가의 밥그릇 싸움 목적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무라 정신과의는 "최악의 의존증 유발 물질은 ‘알콜’"이라며 "술은 마약과 달리 어디서나 쉽게 구할수 있지만 세계적으로 크게 제한 받지 않는데, 한국 정부가 게임을 중독 물질로 분류해 나쁘게 몰아가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 정치권 ‘동네북’ 신세

정치권의 게임산업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1년 여성가족부는 "게임을 많이 하면 정자가 줄어든다"며 건강을 이유로 16세 미만 청소년 게임 이용을 막는 ‘셧다운제'를 적용했다.

여성가족부는 2011년 게임업계에 해당 기금 2000억원을 조성할 것을 주장했고, 해당 기금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게임업계 반발이 거세지자 기금 제도는 업계가 자율적으로 판단할 사안이라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PS4 게임기 컨트롤러. / 유튜브 갈무리
PS4 게임기 컨트롤러. / 유튜브 갈무리
셧다운제는 국내 게임기 플랫폼에 큰 타격을 안겼다. 소니는 2011년 11월 18일부터 만16세 미만 청소년의 로그인과 신규 가입을 정지하겠다는 방침을 내렸다. 셧다운제는 지금도 플레이스테이션과 엑스박스 청소년 이용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 부모 주민번호 도용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2013년 1월에는 박성호, 손인춘 의원이 게임 제작사 매출의 5%, 1%를 게임중독 치료와 업계 상생을 위한 자금으로 징수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게임업계는 매년 사회공헌에 수백억원의 비용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중독세'까지 걷는 건 부당하다고 맞섰다. 실제로 대형 게임3사 중 넥슨은 매년 60억원 안팎을 사회공헌 활동 비용으로 사용한다.

게임중독 법안 발의에는 신의진, 유승민, 이인제, 유정복, 서병수 의원도 참여했다. 당시 부산 해운대구가 지역구였던 서병수 의원의 발의 동참으로 게임업계에서는 2013년 부산에서 열리는 게임쇼 ‘지스타' 보이콧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2013년 10월에는 일명 ‘신의진법'이 게임업계를 괴롭혔다. 정신의학자 출신 신의진 의원은 당시 입법 발의안을 통해 게임을 도박과 마약, 알콜과 같은 중독 물질로 규정하려 했다.

당시 이해국 한국중독정신의학회 교수는 "중독법에서 게임을 빼느니 차라리 마약을 빼겠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신의진법은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혀 19대 국회와 함께 사라졌다. 이렇게 사라졌던 법들이 ‘게임 질병 코드 분류’를 기점으로 좀비처럼 되살아나 또다시 득세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