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천자’ 글감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산문집 《무서록》(無序錄) 중에 실린 수필 <성>(城)입니다. 빼어난 미문으로 유명한 이태준의 글은 이미 수필 <수선>과 《문장강화》 다섯 대목을 통해 만나본 바 있습니다. 산자락과 나무들, 성돌을 그리듯 묘사한 글을 감상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를 사는 우리 스스로를 위로해 보세요. /편집자 주

이태준이 살았던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성북동에 위치했으니, 글에 나오는 ‘성(城)’은 한양도성일 것이고, 그 중 백악구간일 터이다.
이태준이 살았던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성북동에 위치했으니, 글에 나오는 ‘성(城)’은 한양도성일 것이고, 그 중 백악구간일 터이다.
성(城) (글자수 1200, 공백 제외 900)

아침마다 안마당에 올라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들고 돌아서면 으레 눈은 건너편 산마루에 끌리게 된다. 산마루에는 산봉우리 생긴 대로 울멍줄멍 성벽이 솟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솟은 성벽은 아침이 첫 화살을 쏘는 과녁으로 성북동의 광명은 이 산상(山上)의 옛 성벽으로부터 퍼져 내려오는 것이다. 한참 쳐다보노라면 성벽에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도, 성(城)돌 하나하나 사이도 빤히 드러난다. 내 칫솔은 내 이를 닦다가 성돌 틈을 닦다가 하는 착각에 더러 놀란다. 그러다가 찬물에 씻은 눈으로 다시 한번 바라보면 성벽은 역시 조광(朝光)보다는 석양의 배경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느끼곤 한다.

저녁에 보는 성곽은 확실히 일취이상(一趣以上)의 것이 있다. 풍수(風水)에 그을린 화강암의 성벽은 연기 어린 듯 자욱한데 그 반허리를 끊어 비낀 석양은 햇빛이 아니라 고대 미술품을 비추는 환등빛인 것이다.

나는 저녁 먹기가 아직 이른 때면 가끔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성(城) 터진 고개에서 백악순성로(白岳巡城路)를 한참씩 올라간다.

성벽에 뿌리를 박고 자란 소나무도 길이 넘는 것이 있다. 바람에 날려온 솔씨였을 것이다. 바람은 그 전에도 솔씨를 날렸으련만 그 전에는 나는 대로 뽑아버렸을 것이다. 지금에 자란 솔들은 이 성이 무용물이 된 뒤에 난 것들일 것이다. 돌로 뿌리를 박고 돌로 맞벽을 쳐올려 쌓은 성, 돌, 돌, 모래 헤듯 해야 할 돌들, 이 돌 수효처럼 동원되었을 그때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성자성민야(城者盛民也; 성이란 무수한 백성이다)라 한 말과 같이 과거 문화물 중에 성처럼 전국민의 힘으로 된 것은 없을 것 같다.

팔도강산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방방곡곡의 방언들이 얼마나 이 산 속에 소란했을 것이며 돌 다듬는 정소리와 목도 소린들 얼마나 귀가 아팠을 것인가.

그러나 이제 귀를 밝히면 들려오는 것은 솔바람 소리와 산새 소리뿐, 눈을 들어 찾아보면 비치는 것은 다람쥐나 바쁘고 구름만이 지나갈 뿐, 허물어져 내린 성돌엔 앉아 들으나 서서 보나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멀리 떨어지는 석양은 성머리에 닿아선 불처럼 붉다. 구불구불 산등성이로 달려 올라간 성곽은 머리마다 타는 것이, 어렸을 때 자다말고 나와 본 산화(山火)의 윤곽처럼 무시무시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꺼지는 석양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요히 바라보면 지나가는 건 그저 바람이요 구름뿐이다. 있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런 것은 생각하면 이런 옛 성만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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