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다. 항공기에 탑승해 세계 이곳저곳을 마음껏 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항공기 승무원들도 직업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항공성 치매’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항공기 파일럿이나 승무원들 사이에 직업병으로 통하는 ‘항공성 치매’는 장시간 하늘 위를 날아다닌 이들을 괴롭히는 건망증의 일종이다. 의학적으로 검증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비행 좀 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십중팔구 이 질환(?)에 시달린다.
최근 나이를 불문하고 인지능력 장애에 시달리는 이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채 ‘내 스마트폰 봤냐’고 묻는 이가 있는가 하면, 외출을 위해 배낭을 뒤에 메고서 가방 찾아 삼매경인 경우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의학적으로 인지능력 장애는 뇌 속 아밀로이드 베타(단백질의 일종) 축적량이 늘어나며 발생한다. 항공성 치매는 일반적인 인지능력 장애와 다른 현상이지만 증상만 놓고 보면 유사한 점도 있다.
한 항공기 조종사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며 "동료 조종사가 지난번 함께 했던 비행이 즐거웠다고 말을 걸어올 때면, 실제로 그와 언제 비행했었던 것인지 떠오르지 않아 대화를 이어가지 못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항공성 치매에 시달린다는 승무원들의 일화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승객의 주문을 받은 후 주방(갤리)에 왔는데, 어떤 주문을 받았는지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비행을 끝낸 후 내릴 때 책 등 작은 짐을 자주 두고 내려 곤란하다는 사연도 있다. 이쯤 되면 ‘스튜어디스 등 승무원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한 후 원하는 물품이 오지 않더라도 무작정 불만만 토로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최근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국제선이나 국내선 운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집에 머무는 항공기 승무원이 확 늘었다. 쉬는 기간이 늘어나면 항공성 치매가 나아질까.
25년 차 한 스튜어디스는 "집에서 쉬는 기간이 늘었다고 해서 이 직업 가진 승무원의 항공성 치매가 나아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며 "평생 가져가야 하는 자랑스러운(?) 직업병 아니겠냐"고 말했다.
승무원들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다. 서로의 항공성 치매를 드러낼 수 있는 질문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라는 둥 ‘우리 언제 같이 비행했었지’ 식으로 묻지 않는다. 지인 중에 승무원이 있다면 이런 질문은 가급적 피하자. 아울러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코로나19 사태가 조속히 해결돼 항공기 승무원들이 본업에 조속히 복귀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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