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구보 박태원(1909~1986)의 대표작 《천변풍경》과 또다른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는 1930년대 서울의 풍속과 세태가 파노라마 사진기로 찍듯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구보의 외손자가 영화감독 봉준호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편집자 주

신랑 박태원과 신부 김정애의 결혼사진(왼쪽). 1934년 10월 27일 다옥정(지금의 중구 다동 7번지, 구보의 생가)에서 열렸다. 이 결혼식에는 구보의 친구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 사인을 남겼다. 오른쪽 위는 화가 안석주, 오른쪽 아래는 시인 김기림의 사인.
신랑 박태원과 신부 김정애의 결혼사진(왼쪽). 1934년 10월 27일 다옥정(지금의 중구 다동 7번지, 구보의 생가)에서 열렸다. 이 결혼식에는 구보의 친구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 사인을 남겼다. 오른쪽 위는 화가 안석주, 오른쪽 아래는 시인 김기림의 사인.
천변풍경 ④ (글자수 918, 공백 제외 681)

음력 삼월 중순, 내일 모레 창경원의 야앵이 시작되리라는 하늘은, 매일같이 얕게 흰 구름을 띄운 채, 훤하게 흐리다. 사람들의 마음이 애닯게도 들뜨려 할 때, 배다리 골목 안, 최 장님 집에서는, 그 건넌방을 빌려 든 이쁜이네에게, 오늘 크나큰 경사가 있다 해서, 이른 아침부터 좁은 집 안에 사람이 들끓었다. 작년 가을부터 말이 있어 오던 이쁜이가, 기어코 이날을 기약하여 아랫대 강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다.

가지고 갈 것이라고는 칠 원에 사들인 조그만 머릿장 하나, 고등 문화견 금침 한 벌. 선치받은 인조견 치마 저고리 두 벌. 그리고 다음은, 값싼 경대와 반짇고리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것도 없는 사람 눈에는 퍽이나 장하여 보였다.
(중략)

신랑은 예정보다도 한 시간이나 늦게, 거의 새로 한 점이나 되어서야 왔다. 신부 집보다는 나아도, 역시 그다지 넉넉지는 못한 신랑 집의 일이라, 제법 예라고 갖추는 수 없이, 신랑은 평복을 한 채, 기러기 아범으로 나선 친구 한 명과, 남치마를 얻어 두르고 보자기에 사모관대를 싸서 머리에 인 옆집 계집 하인 하나를 데리고, 골목을 걸어 들어와, 미리 정하여 두었던 대로, 바로 한 이웃집 문간방에 가 들어앉아, 그곳에서 옷을 벗고, 사모관대를 하였다. 신부의 당의나 한가지로, 그것은 일 원짜리 세물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냥 평복과는 비길 수 없어, 역시 그만한 위의와 경건한 무엇이 그 예복에서 느껴졌다.
(중략)

그러자 대문간에, 갑자기 우락부락한 젊은 놈 말소리가 들렸다. 거지들의 둘째 대장이라는 녀석이, 바로 잔칫집이라고 달려든 것이다. 이 구차한 집에 대체 무엇을 얻어먹으러 왔느냐고, 이쁜이 어머니는 그 주근깨 투성이 조그만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입이 아프게 말하였으나, 끝끝내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수 장국에다 한 푼의 오십 전 은화를 얹어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 단어 풀이
- 야앵 : 夜櫻. 밤 벚꽃놀이.
- 아랫대 : 서울 성안의 동남쪽 지역을 이르던 옛말. 동대문 쪽에 해당된다.
- 문화견 : 바둑판무늬 모양으로 짠 천.
- 세물 : 貰物. 돈 주고 빌린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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