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 (53) 여명(黎明) 속에서 부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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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4.29 04:00
더 재미 있는 하루천자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주 5회 필사하는 고전을 월·화요일과 목·금요일에 연속 게재하고, 수요일에는 짧으나 깊은 공감을 주는 콘텐츠를 골라 제시함으로써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합니다. 《프랭클린 자서전》은 30일과 5월 1일 3·4편으로 이어집니다.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산문집 《무서록》(無序錄) 중에 실린 수필 <여명>(黎明)을 소개합니다. 빼어난 미문으로 유명한 이태준의 글은 이미 수필 두 편과 《문장강화》 다섯 대목을 통해 만나본 바 있습니다. 동 트기 전 석굴암을 오르는 기분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국보 24호 경주 석굴암 석굴은 신라 경덕왕 때(751년)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해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1913년 이후 일제 주도의 수차례 해체·조립·수리를 거쳤고, 해방 이후 오래도록 방치되다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문제가 발생해 그때그때 방책을 세웠으나, 원형에 대한 논란이 있다.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사진은 이태준이 마주했을 1954년 당시의 석굴암 본존불.
여명(黎明) / 이태준 (글자수 767, 공백 제외 592)

우리는 불국사에서 긴긴 여름날이 어서 지기를 기다렸다. 더웁기도 하려니와 처음 뵈입는 석불을, 낮에도 밤에도 말고 여명 속에 떠오르심을 뵈이려 함이었다. 밤길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에 닿았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암자에서 석굴은 지척이지만 우리는 굳이 궁금한 채 목침을 베었다.

산의 고요함은 엄숙한 경지였고 잠이 깊이 들지 못함은 소리 없는 여명을 놓칠까 함이었다. 우리들은 보송보송한 채 중보다도 먼저 일어나 하늘이 트기를 기다렸다.

하늘이 튼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사람으로는 모래알만큼 적어서 기다리고나 있어야 할 거대한 탄생이었다. 몇만 리 긴 성에 화광(火光)이 뜨듯 동해언저리가 벙짓이 금이 도는 듯하더니 은하색 광채가 번져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을 앞세우고 조심조심 석굴로 올라왔다. 석굴은 아직 어두웠다. 무시무시하여 우리는 도리어 주춤거려 물러섰다. 아무도 무어라고 지껄이지 못하였다. 이윽고 공단 같은 짙은 어둠 위에 뿌연 환영(幻影)의 드러나심, 그 부드러운 돌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여명에 쪼여지실 때는, 이제 막 하강하신 듯, 자리잡는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

어둠은 둘레둘레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나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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