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하루천자’ 글감은 1930년대 시단에 등장, 방송인·기자로도 활동했던 노천명(盧天命, 1911~1957)의 시를 골랐습니다. 일제 말기에 다른 많은 문인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에 동조, 문학과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습니다. 해방 뒤에는 잠시 좌익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이름을 올렸으나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력과 6·25 때 남아있던 서울에서의 부역 때문에 ‘좌익 분자’로 20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문인들의 진정 덕분에 석방됩니다. 휴전 후 강의와 창작을 이어가다가 재생불량성빈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꼿꼿하다 못해 오만하다고까지 여겨진 성격의 소유자로 일생 동안 고독하게 지낸 노천명의 아래 시는, 아이러니하게도 춘향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투리의 말맛을 살려 음미해 보세요. /편집자 주

친일파 시인으로 알려진 노천명(왼쪽 사진)은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오른쪽 사진)을 내고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시집 뒷부분에는 친일시가 아홉 편 실려 있었는데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뒷부분의 친일시 부분만 뜯어내고 그대로 판매하고 만다. 전쟁 말기 상황에서 미처 배포하지 못하고 쌓아놓고 있던 시집을 땅속에 묻거나 태워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친일파 시인으로 알려진 노천명(왼쪽 사진)은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오른쪽 사진)을 내고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시집 뒷부분에는 친일시가 아홉 편 실려 있었는데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뒷부분의 친일시 부분만 뜯어내고 그대로 판매하고 만다. 전쟁 말기 상황에서 미처 배포하지 못하고 쌓아놓고 있던 시집을 땅속에 묻거나 태워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춘향(春香) / 노천명

검은 머리채에 동양여인의 ‘별’이 깃들이다

‘도련님 인제 가면 언제나 오실라우
벽에 그린 황계 짧은 목 길게 늘여 두 날개 탁탁 치고 꼬끼오 하면 오실라우
계집의 높은 절개 이 옥지환과 같을 것이오
천만 년이 지나간들 옥빛이야 변할랍디어’
옥가락지 위에 아름다운 전설을 걸어놓고
춘향은
사랑을 위해 형틀을 졌다

옥 안에서 그는 춘(椿)꽃보다 더 짙었다

밤이면 삼경을 타 초롱불을 들고 향단이가 찾았다
춘향 ‘야이 향단아 서울서 뭔 기별 없디야’
향단 ‘기별이라우? 동냥치 중에 상동냥치 돼 오셨어라우’
춘향 ‘야야 그것이 뭔 소리라냐―
행여 나 없다 괄세 말고 도련님께 부디 잘해 드려라’

무릇 여인 중
너는
사랑할 줄 안
오직 하나의 여인이었다

눈 속의 매화 같은 계집이여
칼을 쓰고도 너는 붉은 사랑을 뱉어버리지 않았다
한양 낭군 이도령은 쑥스럽게
‘사또’가 되어 오지 않아도 좋았을 게다

- 1945년 2월 노천명 제2시집 《창변(窓邊)》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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