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 (93) 레디메이드 인생 ①… 대량생산 인텔리의 일자리 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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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6.15 04:00
‘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에는 일제 강점기 한국소설가·극작가·문학평론가·수필가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의 단편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을 골랐습니다. 전북 임피군에서 출생하여 서울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채만식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써 온 소설로 등단했고, 곧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계기가 된 작품 《레디메이드 인생》을 필사하면서 채만식의 ‘풍자’를 찾아보세요. /편집자 주

채만식(왼쪽)은 다른 친일 문학가처럼 강연·친일적 소설·시로 친일 행위를 했다. 하지만 별로 튀는 행동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채만식은 광복 이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친일 행위를 한 것이 정당화될 수 없지만, 채만식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단 양심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하의 남한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을 정확히 2주 앞둔 6월 11일, 48번째 생일을 한달 앞두고 47세로 사망한다. 오른쪽은 1934년 5월호 《신동아》에 발표된 《레디메이드 인생》.
레디메이드 인생 ① (글자수 913, 공백 제외 691)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

K사장은 안락의자에 폭신 파묻힌 몸을 뒤로 벌떡 젖히며 하품을 하듯 시원찮게 대답을 한다. 두 팔을 쭉 내뻗고 기지개라도 한번 쓰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눈치다.

이 K사장과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공손히 마주앉아 얼굴에는 ‘나는 선배인 선생님을 극히 존경하고 앙모합니다.’ 하는 비굴한 미소를 띠고 있는, 구변없는 구변을 다하여 직업 동냥의 구걸 문구를 기다랗게 늘어놓던 P… P는 그러나 취직 운동에 백전백패의 노졸(老卒)인지라 K씨의 힘 아니 드는 한마디의 거절에도 새삼스럽게 실망도 아니한다. 대답이 그렇게 나왔으니 인제 더 졸라도 별수가 없는 것이지만 헛일 삼아 한마디 더 해보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어떻게 해 주십사고 무리하게 조를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면 이담에 결원이 있다든지 하면 그때는 꼭…"

(중략)

K사장은 P가 이미 더 조르지 아니하리라고 안심한지라 먼저 하품 섞어 ‘빈 자리가 있어야지’ 하던 시원찮은 태도는 버리고 그가 늘 흉중에 묻어두었다가 청년들에게 한바탕씩 해 들려주는 훈화를 꺼낸다.
"그렇지만 내가 늘 말하는 것인데 저렇게 취직만 하려고 애를 쓸 게 아니야. 도회지에서 월급 생활을 하려고 할 것만이 아니라 농촌으로 돌아가서…"

"농촌으로 돌아가서 무얼 합니까."
P는 말 중동을 갈라 불쑥 반문하였다. 그는 기왕 취직 운동은 글러진 것이니 속시원하게 시비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다.

"허, 저게 다 모르는 소리야… 조선은 농업국이요, 농민이 전 인구의 팔 할이나 되니까 조선 문제는 즉 농촌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아, 지금 농촌에서 할 일이 오죽이나 많다구?"

"저는 그 말씀 잘 못 알아듣겠는데요. 저희 같은 사람이 농촌에 가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잖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가령 응… 저…"
K사장은 끝내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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