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 (102) 나목(裸木) ③…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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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6.25 04:00
‘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 필사감으로는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데뷔작 《나목(裸木)》을 골랐습니다. 박완서는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 15편의 장편 소설과 100편이 넘는 단편 소설, 그 외 많은 산문과 동화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한 ‘영원한 현역 작가’였습니다. 작가 자신이 ‘첫 작품이자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꼽은 《나목》을 필사하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세요. 2012년 세계사에서 나온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을 참조했습니다. /편집자 주

《나목》은 1992년 장수봉이 연출하여 MBC 6.25특집극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나(경아) 역은 김희애가, 옥희도 역은 박근형이 맡았다.
나목(裸木) ③ (글자수 793, 공백 제외 583)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생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시작하게 된 것일 게다. 그러고 보니 옥희도 씨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구원일까. 그를 못 만났다면 지금쯤 어쩌면 나는 정말 지쳐서 허물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진이 오빠가 가엾어하기에 알맞은 꼴로 말이다.

(중략)

옥희도 씨와 나는 아무런 약속도 안 했으면서 매일 밤 어김없이 침팬지 앞에서 만났다. 눈이 몹시 온다든가 날씨가 유별나게 춥다든가 하면 완구점 앞의 구경꾼은 우리 둘뿐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주인에게 태엽을 틀어달라기도 미안쩍어서 한참 그놈의 무료한 얼굴만 보고 섰다가 가야 했다.

실상 나는 침팬지가 위스키를 마시든 안 마시든, 검둥이가 징을 치든 말든 그게 그닥 대수롭지 않았다. 어김없이 그 앞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데만 열중하고 있어 그 밖에는 매사에 심드렁했다.

(중략)

먼저 태수가 내 손 사이에서 자기 손을 빼서 점퍼 주머니에 찌르고 겸연쩍은 듯이 딴 곳을 봤다. 벌겋게 상기한 한쪽 볼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여벌로 또 하나의 태수가 있었으면 했다. 내가 마음 편하게 무관심할 수 있는 태수와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애착하고 접촉할 수 있는 태수가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한 사람에게 내 멋대로 애착과 무관심을 변덕스럽게 반복한다는 것은 암만해도 좀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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