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 (103) 나목(裸木) ④… 그가 바로 저 나목처럼 살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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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6.26 04:00
‘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 필사감으로는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데뷔작 《나목(裸木)》을 골랐습니다. 박완서는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 15편의 장편 소설과 100편이 넘는 단편 소설, 그 외 많은 산문과 동화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한 ‘영원한 현역 작가’였습니다. 작가 자신이 ‘첫 작품이자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꼽은 《나목》을 필사하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세요. 2012년 세계사에서 나온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을 참조했습니다. /편집자 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나목(裸木)》 속 옥회도의 모델은 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이다. 왼쪽은 박수근 作 〈나무와 여인〉(1956, 하드보드에 유채, 27*19.5cm). 오른쪽은 가족과 함께 한 박수근 화가. 사진 속에 〈나무와 여인〉이 보인다.
나목(裸木) ④ (글자수 801, 공백 제외 604)

S회관 화랑은 3층이었다. 숨차게 계단을 오르자마자 화랑 입구였고 나는 미처 화랑을 들어서기도 전에 입구를 통해 한 그루의 커다란 나목(裸木)을 보았다. 나무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놓고 빨려들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古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綠陰)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나무와 여인〉. 그 그림은 벌써 한 외국인의 소장으로 돼 있었다.

나는 S회관을 나와 잠깐 망연했다. 오랜 여행 끝에 낯선 역에 내린 듯한 피곤인지 절망인지 모를 망연함, 그런 망연함에서 나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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